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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Feb 17. 2024

금강 자전거 순례길 3

다시 달려라~ 뷔나


7. 2024년 2월 16일 금 공주보~대학리~공주보 13.3km×2=26.6km


나의 즉흥성이 어디까지 펼쳐지는지 정말 모르겠다.

대전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 일을 마치고 공주보 인증센터로 갔다. 빨간 부스가 보였다. 그걸 보니 국토종주 자전거 여행 수첩이 떠올랐다. 그전에는 자전거길을 달려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보이지 않았던 부스. 그런데 자전거 종주 관련한 정보를 찾아보니 국토종주 자전거 인증 수첩이라는 게 있었다.

혹시 그걸 살 수 있나 둘러보았는데 사무실이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자전거 인증 수첩 파는 곳을 찾아보았다. 어, 백제보 인증센터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 전화를 해보았더니 아리따운 목소리로 맞다고 한다. 그리곤 잠시 후에 뵙겠다고~. 내비게이션을 봤더니 25km쯤 되는 길이었다. 냅다 출발했다. 강변이 아니라 빙 돌아가는 길이었다.      


백제보 인증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 20분.

금강보 관리단에서 수첩을 사는 데 신분증도 필요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이 수첩을 당근에서 사고판다고 한다. 이유는 국토완주 그랜드슬램 기록이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남의 기록으로 취업하는 사람이나 애써 달성한 기록을 남에게 파는 사람이나 각자의 사정이 얼마나 어려우면 그럴까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아무리 취업난이 심각하다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목적 달성이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그보단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 남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인증 수첩 살 돈으로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니면 정신건강에 훨씬 좋을 텐데 안타깝다. 체력도 시간도 없으니까 그러겠지만. 그리고 인증 수첩을 파는 사람도 자전거는 잘 탈지 몰라도 스포츠 정신은 전혀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기록을 돈 받고 팔다니.

현금 4,500원을 내고 수첩을 전산등록하는 동안 건물을 둘러보았다. 한쪽에는 강을 부감으로 볼 수 있는 흔들의자도 있었고 빈백 소파도 있었다. 또 다른 한쪽에는 전시관도 있었다. 백제보 인증센터에 두 번이나 왔었는데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 모르고 지나쳤다.


수첩을 받아 들고 편의점에서 김밥을 샀다. 편의점 김밥이 3000원이나 했다.

“많이 올랐네요.”

“(바코드) 찍을 때마다 놀라요.”

편의점 직원은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고 훨씬 친절하셨다. 친절함 때문이었는지 영양바와 초코바를 더 샀다.


2:40 차에 올라 공주보를 향해 출발했다. 운전하며 김밥을 먹는데 파는 거라 맛있었다. 며칠째 김밥이다. 집에 먹을 게 없어서 단무지랑 우엉이랑 달걀지단 넣은 김밥을 이틀 먹고 오늘 아침에 남은 밥 조금 물에 끓여 먹은 게 전부였다. 자전거를 타려면 뭐라도 먹어야 한다. 그래서 운동이 좋다. 식욕 없어도 뭘 챙겨 먹게 되니까.      

공주보에 도착. 자전거를 내리는데 고상해 보이는 여자분이 파크 골프장이 어디냐고 물으신다. 주차한 차가 지나치게 많다 싶었는데 파크 골프 하러 오신 분들이었다. 노년의 여유로움이 누런 잔디 위에 펼쳐져 있었다.


3:18 출발

내 목적지는 지난번 도착지점이었다. 벌써 그곳에 갈 줄 몰랐다. 개강하면 대청댐에 가보고 그곳에서부터 거꾸로 내려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망설이다 대전에 가기로 하고는 가까운 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어쩌다 나가는 거 두 가지는 하고 싶었다.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으니 처음엔 불안하고 어색했다. 게다가 공주보에서 조금만 지나면 차도 옆길을 한참 가야 한다. 길 위에 흙과 돌멩이가 많아 울퉁불퉁했다. 차도를 지나 강변 자전거길로 내려가니 그제야 자전거 타는 맛이 났다. 마른 억새는 삐쭉삐쭉 서 있고 하얀 날벌레들이 웅성웅성 뭉쳐있는 길 오른쪽 옆으로 파란 금강이 흘렀다. 하늘보다 더 파란 강물이 바람을 맞아 거꾸로 흐르는 듯 윤슬이 일었다.

길은 내려갔다 올라갔다, 우천 시에는 잠기기도 한다는데 그럴 땐 우회도로가 있었다.

음악도 없고 새소리도 없고 강물은 원래 소리를 내지 않으니 고요한 중에 아무도 없는 자전거길을 달렸다. 사람이 없는 게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지는 낯선 길. 이 낯섦이 좋아 길을 나서는 게지. 햇빛이 밝고 맑다. 집에서 징징댈 게 아니라 나와서 신선한 바깥공기를 쏘이면 저절로 우울함이 증발한다.

검은 철새들이 물가에 가득하다. 금강에는 철새가 많은데 가창오리도 검은머리물떼새도 아니다. 이름을 알고 싶다.


대충 어디쯤일까? 얼마를 가면 그곳이 나타날까? 이 정도 왔으면 나올 때가 됐는데. 그날 왔던 길을 반대로 가고 있으니 기억 속의 길을 데칼코마니처럼 회전해야 한다. 그럼 도반이 차도까지 올라갔던 길이 먼저 보이고  그 옆에 파라솔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선 이렇게 상상하고 있었다. 길 모양에 대한 상상을 하면서 그 장소를 다시 보면 내 마음이 어떤 반응을 할지도 조마조마했다.

쉼터가 나온다고 하고 그 쉼터를 지나 여기 어디쯤일 텐데 했을 때 차도에서 이어지는 사선의 길이 보였다. 그럼 그 옆에는 파라솔이 있을 텐데. 어? 파라솔이 접혀 있었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 걸.

뜻밖의 장면은 슬픔을 직면으로 이겨보려는 다짐이 무색하게 마음을 훌쩍 다른 지점으로 옮겨버렸다.   

   

오후 4:10 자전거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물을 마시고 다 그대로 둔 채 초코바를 먹으며 길을 걸어 올라갔다. 도반이 올라갔다 내려왔던 길 위에는 뭐가 있었을까? 나중에 다시 오면 주차할 데가 있나 궁금했었다. 끝까지 올라가 보니 길 건너에 정말 차 한 대 세울 정도의 갓길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새로 지은 큰 기와지붕이 보였다.

호기심을 해결하고 길을 내려오는데 햇살은 벌써 살짝 따가웠다. 오후 네 시가 넘었는데 돌아갈 길이 불안하지 않은 거 보면 낮이 꽤 길어졌다.

지도를 보니 13.3km를 50분에 왔다. 많이 늘었는 걸. 한 시간에 12km 정도 갔었는데 이젠 15km쯤 갈 수 있겠다. 보통 자전거 지도는 한 시간에 20km를 잡는데 뷔나는 바퀴가 20인치로 작아 이 정도도 잘 달린 거다.

     

다시 온 그 지점 (2023년 9월과 2024년 2월)


4:40 다시 출발하고 보니 그 자리는 금강하구둑 75km 지점이었다.

그 75km를 몇 번에 걸쳐 왕복으로 157.1km나 달렸는데도 군산에서 아직 공주다. 잘 타는 사람이면 하루에도 갈 수 있는 대청댐부터 금강하굿둑까지 146km를. 재미있다.

다시 그 자리로 올 때쯤 또 똑같이 물새들이 가에서 물로 도망친다. 잠시 자전거에서 내려서 사진을 찍어보지만, 철새들의 아름다운 몸짓을 포착할 리 없다. 온 길을 다시 간다. 아마도 남은 금강 자전거길을 내내 왕복으로 가겠지. 돌아가는 길의 금강은 갈 때보다 훨씬 더 파랬다.      

내가 뭔가 흥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노래인지 들어보았다.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서로 작별하여 떠나가리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꽃피는 시절 다시 만나리니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다시 만날 때까지’


5:13 다시 공주보 인증센터 도착

드디어 도장을 두 개째 찍었다. 참 재미있다. 지리산 종주 인증수첩도 있지만 나는 그걸 미처 신청하지 못해서 수첩 없이 화대 종주를 했다. 수첩에 인증 도장이 없다고 내가 지리산 종주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런데 인증 수첩이 있어야 종주를 증명하다니. 그저 정보 제공과 동기 부여와 기록 삼아 소지하면 좋을 수첩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인증서를 받은 후 피니스테레에 갔었다. 그때 알베르게 같은 방에 묵었던 독일 여성이 자신은 완주했지만, 인증서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금발의 외모도 멋졌지만, 내면이 진짜 멋져 보였다. 그이는 그 당시 깊은 슬픔에 빠져있던 나에게 음악을 들려주었다. 명상음악이었다. 찾아보면 어딘가 있겠지만 지금 찾을 기력은 없다.      


헬멧을 벗어서 상자에 넣고 자전거를 접어 차 트렁크에 넣고 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공주에서 들를까 말까 고민되는 곳이 떠올랐다. 무시하고 그냥 내비게이션을 집으로 찍었다. 그런데 차를 몰고 가다가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그곳을 검색해 보았다. 2~3km 반경에 있었다. 용기를 내어 가보았다.


그곳은 서울에서 인문학 독서 모임을 하던 곳이 공주로 자리를 옮긴 지점이었다. 그 사람이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설프게 집단보다 개인 편에 선다고 쓴 짧은 몇 글자가 세월이 쌓인 마음을 담을 수 없어서 빚어진 오해를 풀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서로 예상치 못한 만남이라 당황스럽겠지만 그래도 길이 이어져서 가게 되니 이것도 인연이려니 했다.


고풍스러운 교육 도시답게 잘 정돈된 골목에서 내비게이션이 멈추고 차를 공영주차장에 주차한 후 내렸다. 골목으로 들어가 보았지만,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 간판을 가져갔다고 들었으니 못 찾을 리가 없는데 보이지 않았다. 다시 지도 앱을 켜서 확인해 보았다. 바로 앞집이었다. 담 넘어 그 나무 간판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대문과 담장에도 그림과 글씨가 있었다. 발터 벤야민의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그 글귀. 그런데 굳게 닫힌 문과 그 너머 집엔 인기척이 없었다. 어렵게 마음을 내어 몸까지 왔건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 다음은 없다. 오해가 생겼다면 그때 풀었어야 했다. 내 마음을 어련히 알아주겠거니 했던 건 말로 풀지 않는 이상 상대가 알 수 없는 거였다. 스산한 마음에 돌아서는데 골목길에 아기 고양이 세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동네가 고급스러우니 고양이도 페르시안 계열 같은 재색과 검은색 등의 아주 예쁜 품종이다. 다시 차로 가서 타려는데 주차장 옆 카페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와플도 커피도 당기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들어갔다.


실내에는 유자 향이 상큼 달콤하게 진동했다.

“저기요. 혹시 요 앞의 OOOO 언제 문 여는지 아세요?”

유자청을 젓고 있던 젊은 여자는 뒤 돌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나오려다 차만 파는 카페는 아닌듯해 둘러보게 되었다. 온갖 곡물들보다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 책들이었다. 간장 The Ganjang, 전권인 듯한 김연수 소설집.

세 가지 곡물을 섞은 차를 한 잔 시키고 이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화아~ 전면에 붙인 나무 책꽂이에 진열된 알록달록 양장본 책들. 아니 에르노, 헤르만 헤세, 밀란 쿤데라.

만약 내가 전원주택으로 가서 책꽂이를 주문 제작했다면 이렇게 배치했을까?

대체 여긴 어디지? 주인은 누구고?

작은 소파와 나무 작은 책상과 노랑 빨강 초록 의자와 철제 책꽂이에 민음사 전집. 그곳은 누가 봐도 좋아하겠지만 나도 공간이 생기면 그렇게 꾸미고 싶게 실내장식을 한 서점 즉 북카페였다. 으~ 잊었던 꿈이 다시 불쑥 올라왔다.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나무 책상 앞 초록 시트 의자에 앉아 고개를 꺾어 지붕을 보니 상량보에 상량문이 쓰여 있었다. 상량문 앞에 거꾸로 쓰인 용 龍으로 시작해 끝에는 거북 구龜 대신 그 동네 이름의 봉鳳자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곡물차가 올라와서 마시면서 그 공간을 죽 둘러보았다. 나무로 된 창살 안에 새시로 창을 내 옆집 지붕과 주차장이 보였다. 포스터에는 김연수 소설가가 강연하러 온 흔적이 있었다. 이 작은 동네 북카페에? 충남 인문학 모임 중 하나였다. 구석구석 하나같이 예뻐서 한참을 앉아 거기 책을 다 둘러보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녁 6시. 이제 가야 했다.

인사하고 나와 차 문을 여는데 담장에 벽돌이 달려있다. 자세히 보니 가시 돋친 나뭇가지에 실로 벽돌을 매달아 담장 밖으로 처지게 한 것이었다. 아~ 나뭇가지 하나에도 이런 정성을. 참 섬세한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가지에선 무엇이 피어날까? (가지를 자기로 쳤었네 ㅎ)


꽉 막힌 도로를 지나 집으로 오는 곁길로 빠졌다. 사방은 깜깜해졌다. 망설이던 강좌 등록을 하고, 얼결에 자전거 인증수첩을 사고, 국토종주 자전거길 노선도 지도도 얻었다. 아주 한참 후에나 가보려던 추억의 장소를 직면하고, 오래 묵은 감정을 털어내려 남의 동네를 기웃대다 마음에 쏙 드는 카페에서 눈호강하고 차도 마셨다. 아주 알찬 하루였다. 종일 혼자서도 잘했다. 그런데 어깨에 파스 붙여줄 때 사람이 필요하구나. 큭


아, 그러고 보니 이렇게 2024년 자전거 순례를 시작한 거네.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길에서 이 곡이 듣고 싶어졌다.

https://youtu.be/44M-gQjH9ag?si=i5UCDoIXloI4q1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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