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교~팔당~능내역~다산 정약용 생가~팔당역64.2+16=80.2km
광흥창역~서강대교~뚝섬전망문화콤플렉스~팔당대교~능내역~다산 정약용 생가~팔당역
17+3 ×2+23+2.6 ×2+1.8+7+4.2=64.2km
한강에서 2km 정도 되는 다리를 건너는 건 어느 다리에서든 짧지 않다. 그리고 고소공포가 느껴진다. 그래서 광흥창역에서 여의도 위쪽 서강대교 북단으로 가서 출발했다. 뚝섬 전망문화콤플렉스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가림막과 의자와 테이블이 즐비했다.
일요일의 한강 변은 세상의 행복이 다 모여있는 듯했다.
한때 내가 원했던 손 잡고 걷는 남녀와 커플 자전거는 태반이고, 아들과 자전거 타는 젊은 아버지나 부부와 아이 셋이 각자 자전거를 타거나 앞뒤로 앉은 더블 시트 자전거 심지어는 트리플 시트 자전거도 있었다. 지정해 놓은 곳에는 텐트나 가림막치고 돗자리 깔고 소풍 나와 도시락 먹는 이들이 가득했다. 서울은 물론 구리시에도 그러한 풍경이 자연스러웠다.
금강 자전거길에서도 영산강 자전거길에서도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진 못했다.
봄날의 햇살 속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은 강변을 질주하는 자전거를 구경하고 나는 그들을 구경했다. 강변의 나들이처럼 소소하지만 흔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려본 적이 별로 없다. 젊은 시절이나 중년에 들어서도 나는 늘 일이 우선이었다. 항상 여유가 없었다. 회식이나 친구들과 여행 같은 것도 싫어했다. 목적이나 목표 없이 늘어지는 걸 질색했었다.
도보순례도 탈핵이라는 명분이 있어서 걸었다. 그런데 자전거순례는?
뷔나 앞에는 ‘핵 발전소 없이 안전하게 살자’ 몸자보가 스템백에 붙어있지만, 영산강 자전거 순례 둘째 날에는 비가 와서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앞치마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한강 자전거순례에서도 입지 않았다. 그냥 타는 것도 힘든데 공기 저항까지 받으면 더욱 힘들까 봐. 아니 실은 나는 비로소 자유롭고 싶었다. 가끔은 익명성에 스며들어 눈에 띄지 않게 바람처럼 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이날도 성동구 용비쉼터에서 강을 건너야 했는데 왼쪽으로 가고 말았다. 가다가 복원한 돌다리가 눈에 들어와 폰으로 사진 찍고는, 한참을 가는데 강물 빛이 탁한 초록색으로 바뀌어서 멈추었다. 지도 앱을 보니 3km를 중랑천으로 가고 있었다. 그나마 3km라 다행이었다. 되돌아가 용비쉼터 앞에서 회전하여 좌회전했다.
한강변은 무척 쾌적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감흥이 없는 게 강 너머 고층 빌딩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연을 느끼기에 부족하다. 팔당대교에 와서야 이어지는 건물 줄이 끊겼다.
거대하고 음울한 팔당댐은 눈에 익숙하다.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면서 농경지와 가옥이 수몰되어서 그런지 한강도 그 아래에서는 슬프게 흐른다. 41년 전엔 4월에도 추웠다. 자전거길은커녕 비포장도로였던 양수리 가는 길. 해마다 슬픔을 확인하러 가는 그 길에는 잊을 수 없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양수리에 계신 엄마 그리고 아빠를 만나러 인천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팔당까지 왔다.
4월 말은 엄마 아빠의 기일이 모여있는 때인데 코로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3년간 전국으로 떠돌았기 때문이었는지 그간 성묘를 못 왔다. 엄마의 기일을 기점으로 나는 사흘 동안 자전거를 타고 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슬픔에 잠길 새도 없이 가는 길에 화강암으로 된 새로운 이정표가 나타났다. ‘남양주 다산길’. 다산과 연관이 있다면 이 길 어느 끝에 무언가 있을 터였다.
팔당대교에서 6km 더 능내역까지 가는 길은 막판 오르막이 매우 가팔랐다. 다시 평지로 내려와 다다른 능내역은 폐역이고 인증센터는 여태 본 중 가장 더럽고 엉망으로 스탬프잉크도 뚜껑이 다 열린 채였다. 주변엔 자전거 대여점 등 뭔가가 북적였다. 그런데 이날 내 종착지는 능내역 인증센터에서 막판에 바뀌었다. 가는 길에 보았던 정약용 유적지. 그곳이 어디인지 찾아보았다.
휴대폰 앱에 위쪽으로 가라고 해서 새로운 길로 갔다. 그 길은 양쪽으로 나무가 가득한 숲길 같은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1.8km가 그렇게 멀 리가 없었다. 다시 찾아보니 2.6km를 왔다. 그리고 지도는 다른 길을 가리켰다. 다시 능내역으로 돌아가 1.8km 아래로 내려갔다. 경사도가 높은 얕은 산을 가까스로 넘으니 생태공원과 그 옆 정약용 유적지가 나왔다. 맞았다. 그곳이었다.
오후 세 시의 화창한 햇살을 받은 그곳엔 오는 내내 봤던 자전거는 한 대도 없었다. 입구에 다산이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표지석에 새겨 있었다.
먼저 정약용의 묘소에 올라갔다. 초로의 남성 다섯 분이 주의 기도를 암송하고 하고 계셨다. 정약용 집안은 천주교였다. 그래서 일가가 박해를 당했다. 함께 귀향갔던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 특별전을 실학박물관에서 4월 30일부터 한다는 현수막이 오는 길 가로등에 걸려 있었다.
내려오니 여유당이 있었다. 안내문을 보았더니 다음과 같다. 일부는 제하고 써본다.
*
‘당호인 여유(與猶)는 선생이 1800년(정조 24년)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를 통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謨)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 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 한다. (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여유당은 노자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여(與)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 하는 듯하거라.’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
선생의 성격이 나와도 비슷한 면이 있어 미소가 지어졌다. 옆문으로 들어가니 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엔 자그마한 방이 하나 있고 왼쪽엔 부엌이 있다. 맞은편엔 장작을 쌓은 헛간이 보이고 양옆으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 방이 많은 걸 보니 가족이 많았거나 손님이 많았던 것 같다. 부엌 맞은편에는 외양간이 있다. 설마 안방 가까이에서 소를 쳤을까?
‘생가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으로 집 앞으로 내(川)가 흐르고 집 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 잡고 있어 선생은 수각(水閣)이라고도 표현하였다’는데, 원형 그대로 복원한 건지 궁금해졌다.
생가 바로 뒤에 묘소가 있는 건 후대의 뜻일까? 생과 사, 삶과 죽음이 그렇게 가깝지 않았던 한국 문화에서 유적지라는 이름으로 한 곳에 모신 건지 이 또한 궁금해졌다.
깔끔한 잔디 넘어 다산 기념관까지 둘러보았다. 정약용 유배의 길을 보니 서울에서 나주, 강진, 포항, 이곳 마재. 모두 가 본 곳이었다. 길 위에서 어느새 가까워진 듯한 다산 선생. 고즈넉하고 따사로운 기운이 가득한 그의 유적지에서 나왔다.
다산생태공원에는 행복한 가족과 연인들이 가득했다. 서울 근교 남양주에 다산이 남긴 여유였다.
...... 강가에서 잠시 강을 응시해 봤는데 날아가는 한 쌍의 새는 없었다. 조련사가 없기 때문이었나 보다.
조금만 한가로웠더라도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카페라테를 마실 생각으로 유적지까지 왔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았다. 편의점에서 작은 에스프레소라테 캔과 생수 한 병을 사서 생태공원 가장자리 나무 테이블과 의자에 앉았다. 혼자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다만 돌아갈 길이 멀어 캔커피에 준비해 간 영양바 한 개를 얼른 먹고 일어났다.
7km를 달리니 팔당역이 나타났다. 2014년에 개통한 경의중앙선 맨 끝 칸에 타니 주말이라 자전거가 가득했다. 지평에서 임진강까지 가는 이 열차를 타면 꽤 멀리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겠다. 하지만 편리한 만큼 서울은 공해도 심각해서 돌아온 동네 호텔 담벼락 대나무는 누렇게 죽어있었다.
오랜만에 서울에 와보니 지하철로 충분히 멀리까지 자전거순례를 할 수 있었다. 인천 끝에서 팔당까지 얼마든지 돌아갈 걱정하지 않고 탈 수 있었다. 서울특별시를 중심으로 인천직할시와 경기도가 이어졌으니 도로도 깨끗하고 화장실, 휴게장소 등 제반 시설도 넉넉하다. 한강 자전거길은 쾌적과 편리 그 자체였다.
이번 자전거순례에서 얻은 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자전거 들고 싣고 가서 타고 올 수 있음. 영산강 순례에서 더욱 발전한 자립심이다. 그리고 서쪽 끝 인천에서부터 한강 따라 자전거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곧 만나 뵐 엄마 그리고 아빠. 4년 만에 찾아뵙는 성묘다. 이 길을 이토록 고되고 진지하게 다가가는 이유는?
팽목항에 갈 때 담양부터 목포까지 자전거 타고 133km 갔던 것처럼 83km에 불과한 아라 자전거길과 한강 자전거길 서울 구간을 200km나 타면서 온 건 부모님께 드리는 지극한 정성이 아닐까? 그렇다고 내가 효녀는 아니지만 무슨 일을 할 때 쉽게 바로 가기보다는 힘들여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가는 게 내 순정이다. 그런 면에서 자전거는 나와 잘 맞는다. 연료를 들이지 않고 페달 밟는 만큼 나아가는 정직성과 노력 면에서.
능내역 다음은 밝은 광장과 양평군립미술과 이포보로 이어진다. 남한강이다. 그 길로 가서 부산까지 가면 633km 국토 종주. 글쎄. 금강 나머지와 섬진강과 동해안을 달려보고 나서 생각해 볼 일이다.
이날 자전거 타고 가는 동안 떠오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이 만화를 안다면 나이 대가 드러날 것이다.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넘고 물길 넘어도
나는 찾아가리 외로운 길 삼만 리
바람아 구름아 엄마 소식 전해다오
엄마가 계신 곳 예가 거긴가
엄마 보고 싶어. 빨리 돌아오세요
아아아 외로운 길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삼만 리
성수와 압구정 도보 9.5km
일본에서 24년 지기 유키코 상이 왔다. 세 살 때 처음 본 치히로가 일본에서 의과대학에 진학했고 지난 3월 말에 우리나라 경북대 의대에 한 달 실습을 왔다. 실습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유키코 상과 둘째 딸 아수카도 함께 왔다. 유키코 상은 두 딸을 모두 의대에 보낸 훌륭한 엄마다. 그러나 그전부터 영어학원 강사이며 청소와 가드닝이 취미이고 베토벤과 쇼팽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할 줄 아는 똑똑하고 귀여운 여성이다.
나와는 인천에서 만나 2년간 한국어와 일본어를 서로 가르쳐주고, 서울을 잘 아는 내가 한국 관광을 시켜준 사이다. 본국으로 돌아간 후 11년 전에 유키코 상과 딸들이 한국에 놀러 왔었고, 6년 전에는 내가 후쿠시마 가는 길에 도쿄에 들러 만났었다.
꼬박꼬박 일본식 연하장을 보내던 유키코 상은 이제 아이폰으로 문자를 보내거나 통화를 한다. 유키코 상은 한국어를 잘한다. 지금도 꾸준히 한국 드라마를 보며 나도 모르는 한국 남자배우를 향한 팬심이 가득하다.
뚝섬 역에서 유키코 상과 치히로를 만나 성수 거리를 돌아다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젊음의 거리가 된 성수에는 유행하는 옷가게와 공장을 개조한 카페가 많았다. Dior 건물을 보고는 유럽에 온 줄 착각할 정도였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가는 상점 족족 일본인이 많았다.
청담동에서 아수카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먹었다. 관광객이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리는 곳은 싫다는 치히로의 바람대로 그곳에는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이 없었다. 곧이어 리현과 선목이 합석했다. 어릴 때 만났던 그들은 다 자라서 만나도 어색한 듯 어색하지 않았다. 선목이 한국에 왔으니 소맥을 마셔봐야 한다며 술을 주문했다. 한국인의 회오리 소맥제조법에 일본인은 신기해했다.
나는 치히로가 한국에서 먹어본 교촌치킨 허니콤보가 맛있었다는 말을 기억하고, 식사 후 2차로 교촌치킨을 먹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모두 좋다고 했다.
잠원한강공원.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도 처음 가보는 그곳에 돗자리를 사서 깔고 압구정 지점에서 포장해 간 교촌치킨 허니콤보와 한강 라면과 음료수를 펼쳤다. 나는 서툰 영어로 말했다.
“Yukico sang, When I was riding my bicyle yesterday, I thought that all the happy people in this world are gathered here. And here I am today.
유키코 상, 내가 어제 자전거를 탈 때 여기는 세상에 행복한 사람들이 다 모여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바로 오늘 내가 여기에 있네요. ”
인생은 그런 거다. 어제 바라던 게 오늘 예상치도 못했는데 이루어지는.
다 함께 한강변을 잠시 걷는데 20년을 훌쩍 지나온 오늘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유키코 상네는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어서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한 살에서 어른이 된 리현은 자동차 몽실이에 그들을 태워 호텔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우리는 선물을 한 아름 주고받았다.
다음 날 그들은 출국했다.
일본에서 가장 긴 연휴가 끝나간다.
드디어 도착했다. 이곳에 오려고 인천 끝에서부터 팔당 지나 능내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 83km를 빙빙 돌아 200km나 타고. 엄마 기일에 출발해 아빠 기일에 맞춰.
4년 만이었다. 공원묘원 제일 위쪽 부모님 옆에는 조부모님도 계시고 그 옆에는 증조부도 계신다. 아래층에는 셋째 고모도 계신다. 그 옆은 미래의 내 자리다. 내 비석 뒤쪽엔 동백나무를 심고 앞쪽엔 배롱나무를 심고 싶었는데 이제 보니 앞쪽엔 심을 자리가 없다.
나는 이제 절도 하지 않고 놀랍게도 기도도 하지 않는다. 면목이 없으니 드릴 말씀도 없다. 그저 목장갑을 끼고 마른 흙에 박힌 잡초를 뽑을 뿐이었다. 벌초라면 어느 정도 자신 있으니까.
엄마는 이렇게 살고 있는 내게 뭐라고 하실까?
지금의 내 삶은 엄마가 바라시던 삶은 아니다. 하물며 할머니가 바라시던 삶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에 가지도, 나만 최고라고 떠받들어주는 남자를 만나지도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그분들이 상상도 못 하시게 인천에서부터 그곳 근처까지 200km를 자전거 타고 왔다. 허벅지와 무릎에는 시커멓게 멍이 들었지만, 누구를 만나야 행복한 여자로 살지는 않게 되었다. 치렁치렁 머리카락이나 주렁주렁 장신구나 비싼 구두나 옷이나 가방을 장착하지 않고, 딱 맞는 단벌 자전거 옷을 오늘 입고 빨아 내일 또 입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가뿐하게 나는 듯 자전거 타는 내가 내 마음에 든다. 나는 고유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 것이다.
다시 서울에서 용산역까지 16km를 너끈히 달렸다.
한강은 여전히 넓고 풍요로웠다. 강변에 사는 게 꿈이었던 적이 없어 한강을 끼고 건설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았다. 부동산 가격에 비례한 그들의 부와 상관없이 한강변이 모래밭일 때도 한강은 여전히 흘렀다. 강가에 콘크리트를 붓고 박석을 깔아 둔치를 만들어 서울 시민의 휴식처가 된 한강변. 배를 타고 건너든 다리를 지나 건너든 모래톱이 있는 한 새들은 찾아온다. 밤섬이 살아있으니 다행이다.
신용산에서 수리 완료된 카메라를 찾아 자전거 뷔나와 함께 기차에 올랐다.
그동안 하도 떨어뜨려 엉망진창이었던 카메라가 프런트 케이스, 하판, RL보드, 뷰파인더런처를 교체해 새 옷을 입었다.
나도 이제 재정비하고 어디든 갈 수 있겠다.
잘 있어요.
쾌적하고 편리한 내 고향 서울 그리고 한강~
떠난 서울에서 좋은 소식이 들렸다.
2024년 5월 2일 이태원 참사 특별법 통과.
그 법이 유족들의 눈물을 조금이나마 닦아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