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감사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곱째별 Jun 01. 2024

thanks for keeping promise

약속 지킴에 감사합니다


3년 전쯤 해남에 있을 때였습니다.

입주작가 동기들과 처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저는 어딘가에 있을 제 거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두 작가가 나중에 제가 거처를 마련해서 상추를 심어 놓으면 삼겹살을 사서 방문하겠다고 했습니다.


2년 전쯤 담양에 있을 때였습니다.

제게 특별히 잘해주시던 작가 두 분이 퇴소 후 연이어 신간을 내셨습니다. 그들은 제게 책을 보내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는 나중에 거처가 생기면 그곳에서 출판기념회를 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집을 구할 때 그 두 약속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몸 하나 누일 곳도 없는 처지에 그분들이 오실 만한 집을 마련해야 하는데, 라고요.

 

작년에 이곳 콩이네로 이사 오고 5월엔 담양에서 만났던 두 작가를 모셔 아주 소박한 출판기념회를 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두 분은 제 책이 나오자 지난 3월에 여기까지 다시 오셔서 제 출판기념회를 해 주셨습니다.


올해 5월에 해남에서 약속했던 작가가 드디어 방문한다고 했습니다. 그 작가는 저와 약속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 약속을 했습니다. 중순에 약속을 정했는데 말쯤에 콩이 사고가 났습니다.

며칠간 매우 심란했고 동네 사람들 눈도 있어 여느 때 같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날 유기농매장에서 장을 보며 사르밧 과부를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과 병에 남은 기름 조금으로 엘리야를 대접했던 여인. 월초에 급여가 나오기에 월말이라 비상금을 탈탈 털어 삼겹살과 달걀과 두부와 콩나물과 사과를 샀습니다. 상추가 아직 덜 자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리도 좀 배웠겠다 며칠만 나중이면 좀 더 풍성하게 대접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까웠습니다.


집 앞 금계국이 만발한 5월 마지막 날, 반짝반짝하는 학생들과 수업을 마치고 콩이 면회하고 집에 오니 벌써 오후 네 시.

일찌감치 와서 근처에서 기다리던 그 작가와 함께 온 동료작가가 잠시 후 방문했습니다. 둘은 먹을거리를 한 아름 사가지고 왔습니다. 쌀과 돼지고기 삼겹살과 목살과 소시지와 맥주와 제 이름이 들어간 막걸리와 과자를...... 해남에서 제가 쌀 한 컵으로 이틀 먹었던 걸 알고 있어서, 뭘 먹고나 사는지 걱정이 됐을 겁니다.


거기까지도 감사했는데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출발한 담양에서는 사모님이 수제된장을, 해남에서 옆방지기였던 작가가 공교롭게도 그곳에 있어 담양 매화나무집 오란다 과자를, 또 뵌 적도 없는 방문 작가 옆방 작가가 와인을 제게 보내왔습니다.


놀랍습니다.


"......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열왕기상 17:16)


저는 늘 가진 걸 아끼지 않고 다 내어주는 편인데 그러고 나면 반드시 그 이상으로 채워집니다.


현미밥과 묵은지 콩나물국과 김치도 없이 삼겹살에 금강 자전거 순례 완주 날 사 둔 산양삼 막걸리 반 병과 별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그들은 갈 길이 멀다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밤 여덟 시. 콩이 못 본 걸 아쉬워하며 설거지 못 하고 가는 걸 미안해하며 떠났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동안 처치곤란이었던 냄비 바닥 탄 걸 벗겨주고 갔으니까요.  


그들이 떠나고 나서 알았습니다. 네 시간 동안 누구도 화장실 한 번 가지 않았음을. 아무도 벌컥 방문을 열어보지 않았음을. 그렇게 아주 조심스럽고 깔끔하게 최선의 예의를 갖춘 모임이었음을. 그럼에도 모처럼 웃을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랬거든요. 제가 화내면 정말 화낼만한 상황인 거라고. 덕분에 악몽 같던 며칠의 시름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무척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습니다.

5월이 그렇게 가고 오늘은 6월 첫날, 세종보 미사에 갔다가 콩이 면회를 하고 왔습니다.  

남은 주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집을 구하기 전에 했던 약속을 전부 지켰습니다.  

홀가분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thank you fro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