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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Jun 18. 2024

동거 열나흗날

콩이 쾌유 일지-미련한 나와 현관문지기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을 때 당신 글을 읽어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을 때 먹는 흰죽처럼.

......

당신 글을 읽으니 또 눈물이 나네요.

......

미련한 찬별이 미련해서 좋아요.'


새벽에 온 문자.  


남도 순례길 어느 구절에 쓴 적이 있다.

2021년 11월 29일 해남 송평해수욕장 모래 위를 걸으면서였다.


'문득 내 글을 읽고 좋아하려면 나처럼 눈물이 많고 물기가 있는 마음이라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은 그런 사람이다. 눈물이 많고 물기가 있는 마음을 가진.

미련한 내가 미련해서 좋다니.......

미련함이란 어리석고 둔함과 아직 익숙하지 못하여 서투름과 품었던 감정이나 생각을 딱 끊지 못함이다.

우린 그다지 만나지도 못하는데 정은 어쩜 사람을 그리 잘 볼까?


그렇다. 나는 어리석고 둔하고 서툴고 품었던 감정이나 생각을 딱 끊지 못한다.

대신 우직하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천성이 솔직하지만 되도록 진실하려고 애쓴다.

그 미련함으로 오늘도 콩이를 돌본다.



07:00 콩이는 안방 밖으로 나온 나를 보자 일어서고, 옷을 걸치고 나갈 준비를 하는 걸 보자 앞발을 들고 뒷발로 서서 버둥거렸다. 혼을 냈다. 그러다 착지할 때 뼈에 충격이 가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콩이 산책과 소변


맞은편 집 앞 자귀나무 옆에 철제 공예품이 늘어난다. 그 집 아들이 취미로 로봇을 만들어다 세워놓는단다. 솜씨가 좋다. 서너 대쯤 되는 로봇 중 하나의 가슴에 별이 붙어있다. 당연히 나를 모르겠지만 별을 좋아한다니 괜히 기분이 좋다.


처음으로 휴대폰 건강 앱을 보니 1.3km. 어제는 2.7km. 그렇다면 콩이 골절 상태로는 꽤 걷는 편.


07:30 새로 받은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고 로열 캐닌을 50g만 덜어주니 웬일로 먹는다. 그나마 절반 정도 먹고 그치길래 손으로 몇 알씩 먹어서 다 먹였다. 항생제 도 딸기잼에 섞어 티스푼으로 주니 싹싹 핥아먹는다.

아침 임무 완수.


오전까지 마무리할 일이 있어 모니터 두 대에 한글 파일들과 영상 파일을 올려놓고 바삐 작업.

에너지를 많이 쓰니 열량이 딸린다. 중간에 밥을 짓고 호박 두부 표고버섯 된장국을 끓여 국에 밥을 말아 떠먹으면서 작업.

가까스로 오전 10:59 감수한 자막 송고.


진이 다 빠져 정오가 넘어 거실 미니 소파에 간신히 누웠다.

유월 바람이 솔솔 시원하게 들어오니 얇은 이불도 덮지 않고 스스로 잠이 들었다.

현관에 엎드린 콩이처럼.


시원한 바람에 목이 칼칼해 눈을 뜨니 오후 한 시가 넘어가 있다.


다시 작업을 한다.

일하다 땀이 확 나면 찬물 샤워를 한다. 작년에는 6월부터 보일러를 틀지 않았다. 지리산행 훈련이었다.

올해는 중순부터니 조금 늦은 편. 하지만 가끔 따뜻한 물에 몸을 푸는 게 심리 안정에 도움이 된다.


콩이는 사고 전에도 바깥에서 늘 목줄을 한 채 엎드려 있었다.

지금도 목줄을 한 채 엎드려 있다. 바닥에 패드와 낡은 이불을 깔아주었다. 어젯밤 켄넬에 넣었더니 난리를 쳐대는 걸로 보아 다시 들어갈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바깥보다 더 시원한 실내에서 목줄에 매여 엎드려 있는 건 똑같다. 단지 목줄의 길이가 절반으로 짧을 뿐.


사고 전에는 온종일 밖에서 햇빛을 못 피해 땅을 파며 헉헉대면서 혼자 있다가 내가 내려가 산책하는 30분만 나를 보았고, 그 외 시간은 내내 나만 기다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늘에서 종일 나를 지켜본다. 내가 방에서 일하느라 보이지 않아도 타이핑 소리와 숨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내 냄새도 맡을 것이다.


우리는 한 공간에 있다.


콩이로선 평생 처음으로 깨끗하고 쾌적한 실내 생활을 하며 고급 사료와 맛있는 간식을 때 맞춰 먹으며, 내 품에 안겨 계단을 내려가고 올라가 짧은 산책으로 용변도 시원하게 해결한다. 음식 냄새를 맡으면 날아오는 파리와 어스름 늦은 오후부터 달려드는 무수한 모기떼의 공격을 겪지 않아도 되고, 가끔 무섭게 자지러지는 길고양이들 소리를 지척에서 듣지 않아도 된다. 오고 가는 차 소리에 그때마다 일어나 짖지 않아도 되고, 이웃이 뿌려놓는 먹다 남은 밥 찌꺼기와 땅에 던져놓는 뼈다귀를 핥지 않아도 된다.

콩이는 불시에 다른 개들 습격을 받아 놀라고 아팠고 다리뼈가 부러져 수술을 받고 초경량 스테인리스 핀을 박았지만, 그 대신 두 달간 위생적이고 안전하고 풍요로운 실내 생활을 보장받았다. 이 한정된 기간 후에 콩이는 지금 생활을 그리워할까? 물론 다시 땅바닥 생활에 곧 적응하겠지만 어쩌면 지금이 콩이 생의 화양연화가 아닐까?


19시가 다가오자 콩이가 일어선다. 딱 12시간 만에 산책 시간이 된 걸 몸이 아나 보다.


정 작가가 선물해 준 유기농 표고버섯을 쬐꼬만 쇼핑백에 몇 개 담았다. 콩이를 안고 내려가 1층 집주인께 드렸다. 콩알 한쪽도 나눠 먹어야 하는데 내겐 풍족하니까.


콩이가 오늘은 반대쪽으로 인도한다. 같이 섞여 있을 때도 예쁘더니 금계국이 다 진 자리에 개망초가 가득하다. 개망초 Win!

콩이는 소변보고 들어와 깨끗한 을 발칵발칵 마신다. 로열 캐닌 100g을 덜어주니 안 먹는다. 손바닥에 놓아주니 2/3쯤 먹는다. 현관이 더운 듯해 다용도실로 옮겨주었다. 항생제 가루약을 딸기잼에 섞어 티스푼으로 주니 싹싹 핥아먹는다.

 

19:50 오늘 콩이 간병 완료.


건강 앱을 보니 오늘 걷기 2.4km. 그럼 아침보다 저녁에, 총 거리는 어제보다 덜 걸었다. 잘했다.



우체통에 상하수도 사용료 고지서가 들어있었다. 지난달보다 1,510원이나 더 나왔다. 상하수도 요금을 내면서 내친김에 자동차세 정기분도 납부했다. 1월에 4.57% 공제되는 선납분 납기일이 있었지만, 그땐 여유가 없었다. 예전엔 한 푼이라도 아끼는 알뜰함으로 늘 선납분을 냈었다.  

은행 업무를 보다 보니 12일 전에 동료 교수가 계좌로 송금한 걸 알았다.

콩이가 어서 회복하길 기원한다는.......

난 알린 적이 없는데 원고 교정 비용을 선납해 준 다른 교수가 사고 소식과 함께 내 계좌까지 공유했나 보다.

미안하고 고맙고 부담스럽다.

이렇게 받기만 하다가 나중에 어떻게 다 갚나.......

콩이 덕분에 여기저기서 은혜를 입는다.

은혜 갚으며 살아야겠다.



콩이가 불편해 보여 다시 현관으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동거 이후 달라진 게 있다면 처음엔 콩이의 건강 상태와 급식과 투약과 배변 때문에 전전긍긍했지만, 상태가 많이 나아진 지금은 콩이가 있으니 잘 때 무섭지 않다. 혼자 잘 때는 현관문을 잠그고 걸쇠를 걸고 안방문을 잠가도 긴장이 됐다. 그런데 지금은 잠들 때 그런 불안감이 없다. 이래서 동거가 좋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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