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지난'이 되어버린 여름 어느 날,
아래층으로 나갔을 때 콩이는 팔딱팔딱 뛰었다.
내가 그 옆 수돗가에서 큰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쭈그리고 콩이 방석을 빨자,
산책하러 나가지 않을 것을 안 콩이는 가만히 턱을 대고 첫째 계단에 엎드려 있었다.
평화로웠다.
빨래 후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놓았다.
몇 시간 후 다시 나가니 물이 따뜻해져 있었다.
콩이를 데려와 물을 끼얹고 샴푸를 해주었다.
도리도리 몸을 흔들어 털고 화살나무 사이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5미터짜리 목줄에 매여 멀리 가지 못했다.
5월 29일에 미용을 해주고 보름 후인 6월 15일이었다.
한 달 후인 7월 22일,
다시 큰 고무대야에 수돗물을 받아놓고 몇 시간 후 나오니 물이 따뜻해져 있었다.
콩이를 데려와 물을 끼얹어주었다.
이번엔 콩이가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바깥에 사는 개라도 한 달에 한 번은 목욕시켜야 한다는 동물병원 미용 선생님의 말대로 했더니 콩이가 적응을 했다.
또 스무날 지난 8월 10일,
다시 큰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따뜻해진 뒤 콩이를 데려왔다.
샴푸를 손에 덜어 머리와 몸통에 문질러 주고 박박 거품을 내는데 콩이가 가만히 있었다.
제 머리에 보글보글 자잘한 거품을 내는 내 손길을 가만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콩이가 문명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평화로웠다.
9월엔 물이 저절로 데워지지 않을 기온이 되었는데 앞집 사람이 털을 깎아놓는 통에 15일에 동물병원에 가서 미용도 하고 목욕도 했다.
미용 선생님의 샴푸 하는 손길은 벅벅.
내 손길은 살살.
강도 차이가 엄청났다.
그렇게 바깥에 살아도 콩이는 매달 목욕하는 깨끗한 개가 되었다.
바쁜 일이 없는 날엔 하루 두 번 콩이와 산책을 한다.
한 번은 윗집 개쪽으로 가서 간식을 똑같이 주고
한 번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온다.
두 번 중 한 번은 동네 한 바퀴를 돌기도 한다.
오늘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가을이 찾아왔다.
벼는 휘청이며 고개를 숙이고 그 옆으로 부드러운 억새가 쑤욱 올라와 있었다.
평화로웠다.
오늘 주인집 앞에는 샛노랗고 풍성한 국화 화분이 19개나 진열돼 있었다.
실은 어제 마트에 갔다가 국화를 살까 하고 화원 쪽으로 가 봤다.
가을이면 국화를 사던 시절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포인세티아를 사던 때였다.
이 동네 마트엔 쓸만한 국화가 없었는데 대신 스노우사파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 애를 사 왔다.
억지 이유를 대면서.
주인집 화분에서 떨어진 국화 한 송이를 주워왔다.
종지만 한 찻잔에 물을 담아 띄워보았다.
평화로웠다.
올해 나비금옥에서 세 해째 소국이 피어날지 안 날지 모르겠지만,
기다리는 마음 역시 평화롭다.
내 평화는 크고 많은 것에 없다.
아주 작고 고요하고 잠깐 멈춘 곳에 있다.
두 번째 산책하러 나가니 주인집에서 국화꽃 아홉 화분을 땅에 심어놓으셨다.
다시 몇 천 송이 중 떨어진 국화 한 송이를 주워왔다.
두 송이라도 가득하다.
내 평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