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2일부터 9월 8일까지 전주에서 서울까지 260(300.6)km를 걸었다.
8일부터 사흘간 법원 앞에서 700배 넘는 절을 했다.
목요일엔 승소했고,
금요일 저녁엔 승소 기념 드레스 입고 시위한다고 해서 비 오는 날 전주까지 갔다 왔다.
그러면서 주간새,사람호 원고 집필과 제작진 뒤풀이와 교정 때문에 쉬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금요일 새벽, 이제야 교정본을 넘기고 쓰고 싶은 글을 쓴다.
지난 토요일 오후, 집필 중에 잠깐이라도 콩이 산책을 시키려고 밖으로 처음 나갔다.
그런데 콩이가 이상했다.
"콩아, 왜 이래?"
어딘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 털을 뭉턱뭉턱 깎아놓은 것이었다.
주인께 여쭤보니 (나는 모르는) 앞집 오빠라는 사람이 바리깡으로 밀었다고 했다.
"아니 왜 남의 개 털을 맘대로 깎아요?"
이사 온 지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뭐라 뭐라 했다.
주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구마순만 다듬으시며 대꾸하시더니 (마지못해) 동물병원에 데려가라고 하셨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주말 내내 원고를 쓰고 월요일에 동물병원 문 열자마자 전화해서 미용 예약을 잡았다.
오후 한 시였다.
병원에선 움푹 파인 길이에 맞추느라고 다시 5월처럼 털을 바짝 깎았다.
그리고 미용비도 만 원 깎아주셨다.
빡빡이 콩이를 데려와서 만 원 깎아주셨다고 했더니 주인이 (병원에서) 왜 자꾸 잘해주냐고 하셨다.
"주인 개라고 하니까 잘해주세요."
주인이 미용비를 주셨다.
주인 입장에서는 그 돈이 얼마나 아까우실까.
사실 서류상으로야 내 개지만, 콩이는 주인 개다.
남의 개 털을 마음대로 깎아놓은 앞집 오빠란 사람이나 나에게나 마찬가지로 콩이는 남의 개다.
그런데 왜 나는 남의 개에게 주인처럼 구는가.
게다가 완전히 남의 개인 저 윗집 개에게까지 매일 간식을 먹여주는가.
그 역시 오지랖 아닌가.
나나 앞집 오빠란 사람이나 뭐가 그리 다른가.
콩이 하나 보고 이 외딴곳에서 사는데
그 애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그것이 소유권과 상관없다 하더라도
내 마음의 중용을 생각해 본다.
최근 오래 소지하던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아마 새,사람행진 중이었던 것 같다.
그리 정신없이 뛰어다녔으니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어도 이상하지 않다.
물질의 수명이 다해 저절로 끊어져 사라졌으니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다만 그건 내가 꿈꾸던 미래의 끄나풀이었다.
나만의 상상의 꼬투리였다.
그걸 갖고 있으면 거기에 딸린 더 큰 게 오리라는 소망이었다.
결국 나는 무언가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걸 분실한 건 알게 된 시점이
은행나무가 있는 어느 잘 꾸민 집에서였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집에 대한 꿈이 스르륵 살아나는,
하필 그런 때였다.
그날 천백 년 된 은행나무를 보고 왔다.
소유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 길을 떠났으나,
어디까지 소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고통의 근원은 욕망이다.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바라지 말아야 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나
바라는 몇 가지의 순도가 높으니
내 괴로움을 그 누가 알랴.
홀딱 미용한 콩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데 바람이 차다.
9월이라 미용하기 좋은 때라고 하지만 털이 빨리 자라야 겨울을 따뜻하게 날 것이다.
털이야 시간이 지나면 또 자랄 테지만
내 마음의 허전함은 무엇으로 채우나.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인생은 새옹지마.
더 큰 것을 얻을 것이다.
또 얻지 못한들 어떠랴.
가벼움이 자유로움을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