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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20251215 수료식

by 일곱째별


7학기 만이다.


오~

레는

색 선물을 받았다.


차를 좋아하실 것 같아서라고 다른 교수들에게는 커피를, 내게는 차 세트를 선물했다.

여덟 명이 돈을 모았다며.

그중에는 지난 학기 학생도 세 명이나 있었다.

수료식에.

끝나는 시점에.

다시 볼 일 없을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감사를 표현했다.

감격스러웠다.


수료증을 나눠주며 한 명씩 악수를 했다.

미리 데우지 못한 내 손이 차가워서 미안했다.

스물다섯 명의 손 느낌이 제각기 달랐다.

악수하는 법에 대해 설명할까 하다 말았다.

어쩌면 내 악력이 유난히 셀 지도 몰랐으니까.


수료식이 끝나고도 학생들은 후다닥 빠져나가지 않고 주춤주춤 남아서 인사를 했다.

평균 신장 180센티미터가 넘는 학생들이 내려다보면 내가 얼마나 작을까.

그래도 교수라고, 한 학기 동안 감사했다고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우리는 사랑하기 좋은 팔을 가졌구나


지난 9월에 한 학생이 준 시집의 제목이다.

열 명의 시인이 세 편씩 내어 만든 그 시집에서 제목만 보고 맨 처음 읽은 시는 다음과 같았다.


*


우리의 대화는 음악이 되고 아마도 미래의 교향곡


양안다



속이 울렁거렸다 잔이 넘치도록 물을 따르면서


이곳은 어딜까 잠에서 깰 때 낯설어 보이는 천장과 더는 빛나지 않는 야광 별

그걸 방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난날 친구는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현관을 열면 언제나 같은 복도

가끔 다른 빛의 구도


"가까운 사람에게 부정적인 고백을 듣게 되겠네요.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문제이니 분쟁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오늘의 숫자: 3"


직접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북서향에서 태양이 떠오을 수도 있는 거라고

너는 말하고


집시와 수비학 중 어느 것을 믿어야 미래가 달라질 수 있을까


너의 운명을 네가 점친다며 타로 카드를 펼쳐 놓을 때 나는 물을 따르며 잔 안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 물거품, 파문

그 속에서 춤을 추는 여인들을 바라보고

무용수들이 산다는 마을과 카드를 펼쳐 놓는 마을의 신녀, 신녀에게 물을 따르는 종자, 그리고......


내가 죽으면 무덤 위에서 춤을 춰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


너의 손이 너의 불안을 선택하고 확인하는 동안 나는 떠나간 친구를 생각했다 그의 운명을 조금만 훔쳐볼 수 있겠냐고, 네게 부탁하지 않았지만

그곳은 어딜까 그가 헤매고 사랑하고 페달을 밟다가 죽게 될 곳


언젠가 현관을 열었을 때 이국의 도시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너는 믿고


그런 장면을 떠올리면 속이 울렁거리고

나는 다시 잔이 넘치도록


*


별, 방랑, 자전거, 직접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일, 물, 춤, 운명, 헤매고 사랑하고 페달을 밟다가.......


이상하게도 제목만 보고 고른 시의 시어들이 나와 닮아있었다.

이후 그 시집을 늘 지니고 다녔다. 물수리 가방 앞 주머니에.

그 시집을 보았을 때 내 생각이 났다는 학생.

선물을 받을 땐 화사하게 만개한 봄꽃처럼 웃어놓고 학기 내내 따로 따스한 눈길을 줄 수 없었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해야 했기에,

선물을 받았다고 편애하는 태도 따위는 내게 있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지난 주 마지막 수업 때 그 학생이 그 시집을 산 독립서점 겸 카페에 찾아갔고 그곳에서 오래전 꿈이 또다시 떠올랐다. 잊을 만하면 솟아나는 공간에 대한 꿈이.

그곳에서 학생에게 전달할 선물을 예약하고, 올 초 교토에서 사 온 4색 볼펜 중 검은색 잉크를 다 써서 같은 상표의 3색 볼펜을 샀다.


그렇게 기말고사는 보고서로 내주고 며칠 후 해남으로 떠났다.

2박 3일 예정이었는데 둘째 날 오전에 문자가 왔다.

'Please help me'

급하게 볼 일을 마치고 밤 9시 30분부터 운전해 완주 거쳐 새벽 두 시에 귀가했다.

수요일 강의 시간에 봐줄 자기소개서를 훑어보고 아침 10시부터 강의.

하루 더 봐서 반가웠던 나와는 달리 뜨악하고 반응 없는 학생들.

종강일에 못 다 나눠준 상으로 선물을 주고 오후 한 시 넘어까지 강의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기말고사로 제출된 작품과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그중 한 학생의 사진과 글.


내 선물이 조용한 신뢰였다는. 그리고 내 글을 읽었을 때 앞으로의 방향을 다시 세울 용기를 얻었다는.


가슴속 깊은 데서부터 감동이 휘몰아쳤다.

그 학생뿐만 아니라 다수의 학생들이 학기 초와는 완연히 다른 수준의 글을 쓰고 있었다.

학생들은 내 칭찬을 씨앗 삼아 재능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불과 서너 달만에 그들은 진심으로 타인을 대하는 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직하고 솔직한 글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딱딱한 껍질을 깨고 속살을 드러내 보이며 그들은 스스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인정이었고 찬사였다. 믿을 수 없다면 자신을 내보일 수 없다. 학생들은 나를 신뢰했으므로 자신을 글에 내보였다. 그 글들을 읽는데 그 자체로 선물이었다.


그리고 오늘 수료식에서 서른 봉의 향기로운 차세트 선물을 받았다. 어쩌면 이 학생들은 무표정 무반응을 유지하며 한 학기 혹은 두 학기 동안 나를 지켜보며 감동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수료식 후 다시 그 독립서점 겸 카페에 잠시 머물렀다. 지난번과 달라진 게 있다면 단체손님이 나간 대신 내 책이 들어온 점. 주인이 내려준 카페라테를 마시며 형광펜과 필름 인덱스를 사면서 그런 공간이 생기면 한 구석에 자리할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아직도 훗날 어디서 무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키는 든든한 누군가 있다면 떠돌다가도 언젠가는 되돌아갈 거라고 추측한다. 그건 기다림을 넘어선 신뢰의 관계일 테니까. 다만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한 학기 동안 머물다 가는 그들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성장이야말로 내게 가장 기쁜 선물이다.



굴뚝새와 떠나는 정원 일기 머물다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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