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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Dec 25. 2022

굴뚝새의 모험 2

정원을 찾습니다 - 원주 파란 방


첫 번째 방


  

2020년 5월 1일, 강원도 원주시 토지문화관.

무작위 추첨에서 하나 남은 외딴 방 창작실 102호.

귀래관에서 출입구가 따로 있고 땅에서 제일 편하게 출입할 수 있는 방이었다.


주인이 숨 한 번 들이켜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파란 방이었다.

6평 방에는 남쪽 정면에 벽으로 막힌 베란다로 통하는 창과 오른쪽 서쪽 창이 있었다.

옷장과 신발장, 화장실과 침대와 책상과 전기스탠드와 의자 둘과 선풍기, 빨래 건조대, 초소형 냉장고와 나무 수납장이 있었다.


주인의 짐은 다음과 같았다.      


스웨덴 산 캐리어와 산티아고 800km 순례를 거쳐 온 36리터짜리 배낭과 카메라 가방과 얇은 배낭과 내 원래 집인 공방에서 수강생으로 만든 가죽가방. 그리고 골동품 경대와 금속공예 촛대와 부조 작품 하나. 은수저와 회화나무 수저받침과 중고 파이렉스 대접 두 개와 유리 티포트와 스테인리스 컵 하나. 몇 권의 책과 원고와 색연필과 노트북과 디지털시계와 미색 시트.      


식사 제공이 되는 집필실이었으므로 최소한의 옷과 신발 외 살림살이는 별 필요 없었다.


주인은 하루 세끼 식사 시간과 산책 외에는 종일 글을 썼다.


집필실에서 혈관처럼 울끈불끈 두드러진 나무뿌리를 거치며 징검다리 밟듯 돌계단을 올라가면 식당이 있다. 아침은 각자 토스트와 주스나 커피를 먹고 마실 수 있고, 점심과 저녁 식사는 시간 맞춰 음식이 준비되는 그곳은 작가들의 천국이었다.


주인은 첫날부터 두 달 내내 음식을 접시에 담아서 맨 끝 식탁에 등 돌리고 앉아 혼자 식사를 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공동식사는 서로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그 정도 상황은 이후 벌어질 인원 제한 조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칠성목과 할머니      



입주 다음 날 아침, 주인은 동네 서낭당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찾아갔다.

가지가 일곱 개인 피나무 칠성목이었다.

하늘 향해 일곱 가지를 쭉쭉 뻗어 올린 기골을 보며 주인도 나무처럼 손을 쭉 뻗어 나무처럼 하늘 정기를 받아들였다.


그 나무와 첫 대면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깨를 심고 있는 모자(母子)가 있었다.

기역자로 구부린 두 허리가 쌍기역처럼 나란했다.

“저도 해보고 싶어요.”

서울내기인 주인은 뭣도 모르면서 덤벼, 어깨너머 본 대로 공이 박힌 막대기로 땅을 찌르고 그 구멍에 깨를 심었다. 할머니는 생전 처음 농사 흉내를 내는 주인에게 ‘전문가’라고 칭찬을 하셨다.      


다음 날, 주인은 할머니 댁 대파 모종 심기에 주전자로 물주는 일을 거들었다.

할머니가 주인에게 말씀하셨다.

“일샘이 많네.”


주말이라 도시에서 농사를 도우러 온 가족들이 주인에게 밥상을 차려주면서 그 집 아들 재산을 은근슬쩍 자랑했다. 모두가 혼자 밥 먹는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그러다 그 집 막내딸이 자그마하게 말했다.

“가끔 우리 엄마 좀 들여다 봐 주세요.”     


이후 두 달간 주인은 가끔은커녕 거의 날마다 서낭당 옆 나무와 할머니에게 들렀다.

먼저 칠성목에게 가서 하늘 향해 쭉 팔을 뻗어 올리면서 “안녕, 나 왔어.”라고 인사하고, 나무껍질을 만져주고, 가끔은 나무 사이에 올라가 가지에 기대앉아서 이 얘기 저 얘기하고 사진을 찍고는 “내일 또 올게.” 하고는 내려왔다.

그 길로 할머니 댁에 가서는 이름이 없어 주인 맘대로 ‘순둥이’라고 이름 지은 허연 개에게 개밥 위에 사료를 뿌려주고, 할머니랑 커피믹스를 마시고 과일도 먹고, 가끔은 현관도 쓸고 모판도 닦고, 흐드러지게 만발해 농염의 절정인 심홍색 목단 옆에서 나무 그네를 탔다.

밥때 되면 여물 달라고 울어대는 소 두 마리에 송아지, 닭들이 있는 집이었다. 할머니는 논도 많고 밭도 많았다. 그래서 온종일 일을 하셨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발병하기 전에는 마을에서 경로우대로 관광버스를 빌려 여행도 시켜줘서 다니셨다는데 전염병 이후론 병원 외엔 마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토지문화관 내에 부군 묘소가 있어서, 박경리 선생님 살아계실 때도 보셨다고 한다. 그런데 토지문화관에서 매일 나무 보러 오는 작가는 내 주인이 처음이라고 하셨다.


주인은 할머니가 좋았다. 시골도 좋았다.      

“여기 좋아요. 저 여기서 살고 싶어요.”

“서울 집 아니었으면 벌써 며느리 삼았지.”      

그 집 아들에겐 손톱만큼도 관심 없던 주인은 시무룩해졌다. 방 한 칸 마련하고 싶은 욕망이 좌절됐기 때문이었는지 할머니랑 살 수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운한 건 잠시, 나무를 보고 할머니 댁을 오가며 어설프게 농사일을 돕는 척 흙과 함께한 그 두 달간 주인은 정말 행복했다.      


6월 마지막 날까지 두 달을 꽉꽉 채운 주인은 토지문화관을 떠나면서 할머니 댁에 들렀다.

마지막으로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울먹이는 주인에게 할머니는 “왜 이래?” 하시면서 당신 눈에도 눈물이 글썽였다. 가면서 먹으라고 찐 감자를 싸주시던 할머니를 안아드리고 주인은 길을 나섰다.

토지문화관을 떠나는 것보다 할머니와 헤어지는 게 슬퍼서 주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내게도 떨어졌다.

짭짤한 사랑의 맛이었다.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코로나 19, 예술로 기록> 수록작 '정원을 찾습니다' 중 일부입니다.



글, 그림 일곱째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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