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꿈꾸는 직장인들의 전략적인 대안, 이대리의 이직 이야기)
인생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고, 원하는 직장에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기는 너무 젊었었는지도 모른다.
직장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내가 옳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업무만 잘 한다고 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보다 그러지 못한 일들이 더 많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의도는 상관없이 좋지 않은 상황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그 시기, 가야 할 길을 모르는 상태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때, 우연찮게 선배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선배와의 만남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뜻하지 않은 행운과 혹은 불현듯 찾아오는 불운을 두고 일희일비하지 않을 자신이 아직은 내게 없다. 하지만 지금, 이것만은 분명히 알 것 같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처한 현실이 불편하고, 불만이 가득 해지는 시기가 올 때, 바로 그때가 변화의 시기이고, 도전의 시기라는 것을 말이다.
잿빛 하늘이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서는 비가 곧 쏟아질 것만 같았다. 둘레길을 걷다 이 길로 가면 집으로 가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내려왔는데, 전혀 생소한 장소가 나타났다. 공장형 창고들이 가득했다. 주위를 걸으면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장소를 벗어나니 논길이었다. 살고 있던 아파트 단지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방향을 잃은 것이다.
집 근처에 있는 산에 둘레길이 생긴 지는 몇 년 되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을 가지 않고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가보았는데 이런 낭패를 겪게 된 것이다.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창고 주변은 한산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없었다. 걷는데 불편할까 싶어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다녀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일주일 내내 야근으로 시달렸다. 더구나 지금 회사 내에서 나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산에서 걷기라도 하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시간을 내었는데, 이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는 곧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사 온지도 몇 년이 지났는데, 이 동네의 지리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5년이 다되어 가지만, 아직도 어디로 가야 할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의 직장생활이 떠올랐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 둘레길로 다시 올라갔다. 방향을 잡기 위해 설치된 표시판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것이 있을까요?”
장난기 섞인 말이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았다. 반바지 차림으로 편한 복장을 한 남자가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산에 올라오니 어두움이 짙어졌다. 그래서인지 분명 낯익은 모습이기는 한데, 누구인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으려고 어색하게 서 있는데, 상대방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실망인데. 날 잊은 거야? 우리 독서모임에서 만났었잖아?”
“아! 선배!”
선배와는 독서모임에서 만났다. 지금과는 달리 열의가 넘쳤던 신입사원 시절, 다양한 책을 읽으며 자기계발을 하기 위해 독서모임에 가입했었다. 그때 선배와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10살 이상 차이가 나서 먼저 선뜻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먼저 다가와 편하게 선배라고 부르라며 친근하게 대해주었고, 만날 때마다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늘 그 점이 고마웠다. 대화를 할수록 격이 없고, 편했다.
독서모임에서 선배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식도 상당했고, 그것들을 논리적이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냈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글쓰기 실력이었다. 어떤 주제의 글도 한 번 읽으면, 알기 쉽고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써 내려갔다. 재미까지 있었다. 그 당시 선배는 외국계 은행을 다니고 있었는데, 상당히 승진이 빠른 경우라는 말을 독서모임에서 들었었다.
바쁘고 정신없는 신입사원의 생활 속에서도 매주 한 번은 광화문으로 가서 모임에 참석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나면서부터는 한 달에 1~2회 참석을 하게 되었고, 2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쭉 참석하지 못했었다. 선배와도 독서모임에 나가지 않게 되면서 연락이 뜸해졌다가, 단절되었다. 선배가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는 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정말 오랜만이다. 여기서 만날 줄이야. 거의 3,4년만 인 거 같은데?”
“그러게요, 여기서 선배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였어요!”
선배가 진심으로 반가웠다. 회사에서 마음 터놓고 대화할 사람도 없었는데, 선배를 본 순간, 예전에 선배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새삼 떠올랐다.
"이 녀석! 이렇게 반가워하면서 나를 못 알아보다니!"
선배는 이 말과 동시에 팔을 목에 걸치더니 헤드락을 걸었다.
“선배는 늘 정장 차림이나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이었잖아요. 지금은 반바지에 반팔. 그러니 처음에 몰랐던 것은 당연하죠. 날도 어두워지고 있고.”
나는 버둥거리면서 대답했다. 선배는 팔을 풀면서 말했다.
"근데 둘레길에서 헤매고 있는 이유는 뭐야?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어린 양이냐?"
"오늘 둘레길을 처음 올라왔다 방향을 잃었어요. 보기에는 큰 산도 아니라 가볍게 둘레길을 산책하려고 했는데, 산은 산이네요. 근데 선배야 말로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나는 이사 온 지 한 달 정도 되었어. 저 쪽 주택가로."
선배는 얼마 전 창업을 했다고 한다. 아파트 단지 옆에 주택 단지가 조성되었는데, 그리로 이사를 온 모양이었다.
"저는 그 옆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그래? 서로 가까운데 사는구나. 내려가는 길은 저쪽으로 가야 해."
선배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둘레길을 걸어 내려왔다. 말은 주로 내가 했고, 선배는 들어주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동안 쌓였던 말들이 많았다.
"우리 오랜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기 아쉽다. 집도 가까운데, 커피나 한 잔 하자."
아파트 단지 입구에 이르자, 선배가 커피전문점을 가리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