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틀'에서 '리더'로, 고객이 만들어준
경희대 근처 원룸에서 재창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의 나는 삶을 너무 거칠게 살아온 탓인지, 컴플레인을 거는 고객들에게 유독 예민하게 반응했다.
업무 범위가 맞네 아니네를 따지며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어느새 대화는 말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비즈니스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입장에서 단 1cm도 물러서지 않는 꽉 막힌 옹고집쟁이였다.
어느 날, 한 고객과 전화로 대판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그리고 일주일쯤 뒤, 내 책상 위로 내용증명 한 장이 날아들었다. 사실 그 시절의 나는 내용증명 좀 받아본 여자였다. 그런데도 하얀 봉투에 찍힌 붉은 직인을 보는 순간, 화가 주체할 수 없이 치밀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디 한 번 해보자 이거지?'
분노로 눈앞이 캄캄한 상태로 봉투를 뜯었다. 젊은 객기였는지, 아니면 결핍이 만든 못된 심성인지, 나는 타협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펼쳐 든 종이에는 예상치 못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당장 소송을 걸겠다는 협박이 아니었다.
고객은 본인의 진심을 조심스럽게 적어 보냈다. 일이 이렇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도 결론은 뜻밖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귀사와의 분쟁이 아닙니다. 얼른 이 일을 잘 마무리 짓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소중한 유지관리 파트너로서 함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를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르고 달래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분노로 떨리던 손이 멈췄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고작 스물여섯?일곱, 수 틀리면 소리부터 지르던 내 모습이 얼마나 수준 낮고 초라한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비즈니스란 단순히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타협하고 대화하며 결과물을 도출하는 과정이어야 했다.
나는 전문가로서 제안하고 리딩하는 대신, 계약서라는 종이를 방패삼아 자료나 옮기는 '셔틀 업무'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돌아보면 이런 공격적인 기질은 척박했던 성장 환경 탓이 컸다. 살면서 쌓인 피해의식은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자격지심을 만들었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내 돈은 반드시 잔금까지 받아내야겠다. 손해 볼 수 없다"는 독기 서린 욕심은 일그러진 내 내면의 민낯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무서웠다. 20대 여성에게 법원, 민사, 소송 같은 단어는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도 그 겁쟁이는 겉으로만 센 척하며 고객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용증명을 다 읽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슴을 채웠던 분노는 어느새 고객을 향한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마치 부모가 사고 친 아이를 다독이듯, 모지랭이 사장을 품어준 그 글귀에 마음이 안정을 찾았다.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의 고객은 일주일 전 성내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 마음이 좀 진정되셨느냐고 나직이 물어왔다.
"아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막무가내였던 것 같아요. 보내주신 내용을 보고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많이 반성했습니다."
나의 사과에 고객사 측에서도 화답했다. "저희도 요구사항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잘 조절해서 기분 좋게 마무리 지읍시다."
이 일은 내 비즈니스 인생의 첫번째?이자 가장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나는 고객과 감정적으로 다툰 적이 거의 없다. 대화와 타협은 비즈니스의 기본 옵션이라는 사실을 몸소 배웠기 때문이다.
(아.. 딱 한번 더 있었는데,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한다.)
정서적으로 황폐한 땅에서 자란 나는 내가 피해보지 않기 위해 싸우는 법만 알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비로소 '고급스러워'졌다. 고객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인내심이 생겼고, 이제는 그 인내심이 참는 게 아니라 당연한 예의로 체득되었다. 이후 나는 나를 멋지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우아하다’라는 자존감을 스스로 챙겨가기 시작했다. 자존감이 바닥이고 열등감이 땅끝인 나도 나를 땅위로 끌어올린 대 사건이다.
이후로도 그 고객과는 수년간 인연이 이어졌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분을 스승처럼 기억하며 감사한다. 사수가 없던 어린 창업가에게, 고객은 가장 혹독하면서도 가장 자애로운 스승이었다. 억지스럽고 고집불통이던 모지랭이 사장을 진짜 경영자로 키워준 건, 한 장의 내용증명이었다.
딱 한번 더 있었던 이야기를 지금 여기 쓸까 말까 ㅎㅎㅎ
앞으로 나의 에피소드를 많이 담아볼 예정이다.
혹시, 사업하는 대표님들 초기 사업하실때 마인드는 어떻게 셋팅하셨나요?
저도 궁금합니다. 이야기들 나누면 좋겠습니다.
나노바나나에 제 얼굴을 적용해서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만들어줬는데 웃겨요. 깔깔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