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남편이 산책을 하러 나간 사이 당신은 언젠가 다이소에서 산 하얀 봉투를 찾는다. 그것은 남편이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작은 수납함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지갑을 열어 푸른색 지폐를 센다. 고작 다섯 장뿐이다. 온통 붉은색 천 원짜리 지폐들로 가득하다. 무슨 일이지? 왜 이리 천 원짜리가 많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 딸의 용돈을 천 원짜리 지폐로 줬던 것이 기억난다. 올해부터 중학생이 된 딸에게는 한 달에 한 번 계좌이체로 용돈을 주게 되어, 더 이상 천 원짜리 지폐를 쓸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 천 원짜리 지폐들로는 봉투를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상금 봉투를 꺼내본다. 다행히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발견한다. 그 빳빳한 것을 꺼내 다시 한번 곱게 펴 아까 그 하얀 봉투 안에 조심스레 집어넣는다. 그리고 봉투 겉에 만년필로 까만 글씨를 적는다.
"어머님, 즐거운 여행되세요.
작지만 제 마음입니다. OO올림 "
짤막한 두 문장이 마음에 든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서 좋다. 당신은 그런 면에서 곧잘 서툴렀다. 특히 어머님과의 관계에서 그랬다. 늘 그 적정한 거리를 찾고 싶어 했다. 봉투 위에 새긴 글씨들이 마침내 적정한 선을 그어준 것만 같았다. 왜 그런 의미를 부여하려는 건지 당신은 잘 알지 못한다. 은박 스티커를 붙여 봉투를 봉한다. 그리고는 남편의 식탁 자리에 놓는다.
남편이 들어오면 그 하얀 봉투를 바로 볼 수 있도록.
오늘따라 남편이 늦는다. 그저 봉투만 바라보고 있다. 며칠 후면 알바비가 들어올 테니 봉투에 담은 금액은 다시 채워질 것이다. 사실 당신은 곧 받게 될 월급을 믿고 봉투를 준비한 터였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누구 말대로 쥐꼬리만 한 그 알바비도 없었다면 당신은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었다.
당신은 10년 넘게 전업주부로 살았다. 첫째를 임신하면서 일을 하지 않았으니 정확히 14년 차 전업주부다. 전에 글에도 썼듯, '어쩌다 전업주부'가 된 것치고는 꽤 긴 시간을 전업주부로 지낸 셈이다. 그러다 두 달 전에 다시 '어쩌다 알바'를 하게 되었다. 원래 당신은 올해 1년 동안 당신이 쓰려는 책을 내고자 글쓰기에만 집중하려 했다. 어느덧 두 아이들이 자랐고, 스스로 경제적 독립을 꿈꾸는 40대 중반인 당신은 이제 곧 돈벌이를 해야만 한다고 늘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올해 1년만, 딱 1년만, 스스로에게 마감기한을 주고 싶었다. 내년부터는 뭐가 됐든 '돈을 벌어야지' 다짐했다. 그것이 당신이 세운 목표라면 목표였고,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1년이라는 마감기한이 어째 아주 불편해졌다. 1년을 지연시킬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내년부터는 돈을 벌 생각이었는데, 좀 당겨서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목표를 저버리는 것일까? 계획을 바꾼다는 건 꿈을 포기하는 일일까? 혹시 이것을 빌미로 그 외로운 책 쓰기를 이제 그만하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보다 어느 순간부터 당신은 카페에서 비싼 돈을 주고 커피를 사 들고 도서관에 가서 글을 쓰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저 내가 좋아서, 내가 잘하고 싶어서 하는 이 글쓰기를, 현재 아무 효용도 없는 이 글쓰기를 지금 내가 이렇게 한가하게 해도 되는 걸까?' 당신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건,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사업을 준비하는 동안 무수입으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경제적 여건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뭐든 먹고사는 게 우선 아닌가. 당신은 전에 없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하기를, 먹고사는 데에는 전혀 지장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건만, 당신의 양심은 편치 못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양심 너머 저 끝,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꾸 붙들고만 싶었다. 당신이 스스로 정한 그 마감기한을 말이다. 마치 아끼고 아꼈다가 이제야 먹을 수 있게 된 아이스크림처럼, 한 입만 더! 한 번만 더!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 했다. 가까스로 알게 된 그 맛을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혹여 놓칠까 봐 두렵기도 했다.
당신이 양심의 가책과 맛있는 아이스크림 사이에서 갈등하는 동안, 어느새 당신의 가슴속에서는 또 다른 새로운 욕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건 양심에 떠밀려서도, 어린아이처럼 아이스크림을 더 먹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당신 스스로 가정 경제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순수한 바람이었다. 당신은 이제껏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여 살아왔다. 자신이 멀티태스킹에 버거운 점을 받아들이고, 최소한의 역할을 선택하여 집중하는 것이 당신의 소신이고 삶의 방식이었다면, 이제 그 한계를 벗어나 당신 스스로가 자신의 역할을 확장하려는 의지이자 도전이었다. 어쩌면 용기였다.
당신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육아와 살림, 글쓰기로 단순화되어 있는 당신의 삶에 알바라는 목록을 추가해야 하므로 그 외의 시간은 쓸 수가 없다. 지금은 글쓰기로 돈을 벌 수 없다. 남편은 곧 다시 일을 할 것이므로 온종일 시간을 비워둘 수도 없다. 이런저런 것을 따져 찾은 알바가 바로 동네 영어 학원이었다. 초등학생 파트타임으로 일주일에 3일, 하루에 3~4시간 일하고 시급 13,000원을 벌 수 있었다.
당신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거나 영문학과를 졸업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학창 시절부터 영어를 좋아했고 영어에 소질이 있어 20대 초반에 잠깐 유아에서 중학생까지 영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었다. 현재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경험과 노하우, 아이들에게 밝은 웃음과 친절함을 선사할 것을 약속하며 영어 학원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14년 만에 다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뎠다.
알바를 하게 되니 주위에서 다들 호의적이다. 남편은 당신을 "김선생"이라 부르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도서관에 갈 때는 "김작가"라 부르며 기사 노릇을 자처했고, 점심에 라면도 맛있게 끓여줬다. 저녁에 설거지도 하기 시작했고 오전에 기본적인 집안일을 했다. 아이들 반응도 나쁘지 않다. 특히 첫째는 사춘기에 접어들어 더 이상 엄마를 찾지 않았고(오랫동안 엄마의 그 껌딱지였던 게 맞나 싶고), 오히려 저 혼자서 아무 잔소리 없이 마음껏 스마트폰을 즐길 생각에 좋아하는 눈치다. 다행히 아홉 살 둘째는 간식만 잘 챙겨주면 되는 아이였으므로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친정엄마도 언니들도 모두 반긴다. 시어머니야 말할 것도 없다.
당신은 왠지 서운하다. '다들 내가 일하기를, 돈을 벌기를 바랐던 걸까?', '이제는 아이들이 컸으니 굳이 육아를 도맡을 전업주부가 필요 없는 거겠지.' 하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낀다. 전에 당신은 나름 전업주부로서 스스로 인정하고 자부심을 갖고자 애썼다. 전업주부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잘 해내려 했다. 하지만 그 일들이 당신에게는 크게 보람이 되지 못했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수입이 없다'는 점이 늘 한계였다. 물론 수입을 직접적으로 내지 않더라도 지출을 아끼는 방향으로 노력할 수는 있었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학원을 보내지 않고 집에서 직접 가르치고, 비싼 외식 대신 손수 밥을 해 먹는 방식 등으로 말이다. 그렇게 전업주부의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 수입을 낸다 해도 그건 당사자만 알 뿐, 주위에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단 몇 시간의 알바로 당신은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자신을 얼마나 추켜세우는지 당신은 모를 수 없게 되었다. 당신 스스로도 자신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간간히 느꼈던 공허함의 실체가 어쩌면 '인정'일지도 모르겠다고 당신은 예감한다.
바로, '인정'받은 자신이 저 하얀 봉투를 준비했다.
몇 년 전 남편이 당신에게 처가식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라며 돈을 줬던 일이 생각난다. 시댁 식구들과 베트남여행 가면서 시어머니가 보내주셨던 용돈도 떠오른다. 보답으로 소정의 선물을 사 드렸고, 그 외에도 때때마다 봉투를 챙겨드리곤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 돈은 당신이 번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온전히 주는 것이 아니었다.
받을 줄만 았았던 당신이, 남편이 번 돈으로 쓸 줄만 알았던 당신이 직접 돈을 벌어서 시어머니에게 드릴 봉투를 마련하였다. 작지만 당신의 성의였다. 이건 당신이 온전히 주는 것이었다. 하여 당신은 이 사소한 봉투 하나에 감회가 남다르다. '그저 받는 마음보다 주는 이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당신은 체감하고 있다.
아직 전해지지 않은 새 하얀 봉투를 보며,
당신의 가슴속에 깃든 그것을 아로새긴다.
드디어 그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린다.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책을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