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집에 손님을 초대했다. 정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시간 되면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을래?" 물었다. 정은 둘째, 아들의 친구 엄마다. 두 아들로 알게 된 우리는 서로 존댓말을 하며 인사를 주고받다가 내가 언니가 되었고 지금은 반말을 섞어한다. 그리 친한 건 아니지만 둘이 만나면 별의별 얘기를 다하는 편한 사이가 되었다. 어떤 계획 하나 일절 없이 즉흥적으로 연락했다.
며칠 전엔 내 생일이었고 친구가 "선혜야 생선이야." 하며 보내준 닭갈비가 냉장고 안에 넉넉히 있었다. 남편은 저녁을 먹고 귀가할 것이고, 그 맛있는 닭갈비를 우리 세 식구만 먹기가 좀 아쉬워 그저 함께 나눠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김에 첫째 딸의 친구 솔도 불렀다. 솔은 우리 집에 가장 많이 놀러 오는 아이로 딸과는 7살 때부터 단짝 친구다. 자주 봐서 내가 친근한지 내 생일에 딸과 함께 약소하지만 돈을 들여가며 정성을 담아 만든 이끼 정원을 내게 선물해 주었다. 그 마음이 어찌나 고맙고 예쁘던지, 밥 한번 대접하고 싶은 터라 고민 없이 딸에게 솔을 부르라고 했다. 이만하면 나의 자축 애프터 생일 파티라고 봐도 될 성싶다.
손님이 오기까지 1시간 반 정도가 남아있었다. 집에 친구를 초대한 줄도 모르고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들 덕분에 그나마 손님맞이를 편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보이는 집 안의 잡동사니들을 제자리에 정리했다. 또 눈에 띄게 주방 벽에 묻은 얼룩들을 세제를 뿌려가며 닦아냈다. 그 얼룩들은 오래돼 찐득하게 붙어 한 번으로는 잘 닦이지 않아 여러 번 문질러 내 팔이 다 아팠다. 순간 '내가 손님 초대할 주제가 못 되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도 했다.
예전에는 그래도 손님이 꽤 왔었다. 딸이 어렸을 때 워낙 친구들을 부르는 걸 좋아했고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친구를 잘 사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딸을 위한 엄마의 마음으로 그랬다. 허나 이제 딸은 엄마가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고, 아들은 성격이 활달하여 친구를 사귀는데 내가 딱히 걱정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 집에 가끔 놀러 왔던 친한 이웃들이 모두 이사를 가, 그야말로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일을 딱 끊었었다. 아이를 위하는 그 엄마 마음이 힘들었는지 요즘엔 친한 이웃이 생겨도 집보다는 밖에서 만나기를 선호한다. 내 집이든 남의 집이든, 집에 사람을 들이는 건 아주 수고스러운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닭갈비를 나눠먹겠다고 정과 아들 친구와 솔을 불렀다. 이 부름은 아이를 위하는 엄마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의 마음이 동해서다. 그러니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용감하게 그들을 부를 수 있었다. 청소기를 다시 한번 돌렸고, 아침에 쌓아둔 설거지도 했고, 눈에 가시인 잡동사니들도 대강 치우고 쌀을 안쳤다. 저녁 메인 메뉴는 당연히 닭갈비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양배추를 쪄 쌈 싸 먹을 계획을 짰다. 거기에 내가 직접 쌈장까지 만들어 먹으면 더 맛있을 테고, 방울토마토, 블루베리와 치즈를 섞은 샐러드와 생일날 받은 아이스크림 케이크까지 대접하면 이만하면 완벽하지 않나 싶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했다. 온몸이 피곤하여 꼼짝도 하기 싫었는데, 어느새 노동요를 틀고 따라 불러가며 아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 내 생일 당일에 온전히 나를 위해 나와의 시간을 선물했었다. 집에서 나 혼자 평소에 보고 싶었던 영화를 봤고, 평소에 제일 하기 싫어하던 일을 했었다. 그와 달리 지금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시간을 위해 흥겹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양배추를 잘라 물에 헹구면서 '결국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살기 위해서 내가 나 자신을 돌보고 헤아려주는 것, 역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기 위한 거구나'라는 결론을 나름 지었다.
시간이 되어 솔이 오고, 아들과 아들 친구와 정 모두 왔다. "언니 뭐 도와줄 거 없어요?" 정의 물음에 난 단박에 거절했다. "전혀 없고요, 주방 안에는 들어오지 말고요. 이 접시들이나 식탁에 놓아주어요." 위생에 민감한 정이 보기에 나의 주방은 좀 부끄러웠다. 그걸 눈치로 아는지 정도 그저 웃으며 내 말에 쉽게 동의해 주었다. 드디어 모두가 식탁 앞에 앉았다. 난 마지막으로 내가 즐겨 듣는 로파이 음악을 틀었고 와인을 꺼내 정의 잔에 따라주었다. 정이 "언니네 원래 이렇게 먹어요? 이 집 아주 분위기가 있네." 했다. 그럴 때도 있고 손님이 와서 특별히 더 신경 썼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더할 수 없이 솔직해져 그 분위기가 아주 편안하고 좋았다.
닭갈비는 생각보다 아이들 입맛에는 좀 매운지 아이들은 얼른 식사를 마치고 놀러 자리를 떴다. 정과 나만 남아 닭갈비를 상추에도 양배추에도 싸 먹으며 와인 잔을 톡톡 부딪혀가며 즐겼다. 이참에 정에게 말을 놓으라고도 권했다. 난 편하게 완전히 말을 놓고 싶은데 정이 너무 예의가 발라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니까 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서 바로 반말을 했다.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게 나쁘지 않았다. 반말이 우리 사이를 더욱더 가깝게 해 줄 것을 알기에 이 낯선 대화의 시작이 조금은 설레고 반가웠다.
"정말 오랜만에 집에 손님을 초대했어. 손님을 초대할 만한 컨디션이 아닌데 같이 닭갈비를 나눠먹고 싶었어."내가 정에게 터놓고 말했다. "그럼 영광이네. 고마워 언니." 한다. 알았다고 했다. 나 나름 생색을 냈다. 나 역시 나 스스로가 준비가 하나도 안된 상태에서 정을 초대했던 나의 마음을 돌이켜봤다. 난 전에 정을 보며 작은 언니를 떠올렸고 정을 통해 작은 언니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런 정을 다정하게 느낀다고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정에게 낭독했던 일이 떠올랐다. 낭독을 듣고 눈물을 흘리던 그 예뻤던 정의 얼굴도 기억이 난다. 내가 오늘 기꺼이 수고를 했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건 바로 '정'이었다. 정과 내가 서로 조심스럽게 주고받았던 '정'말이다. 이제 정과의 관계를 수식하는 말을 바꿔야 할지 모른다.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 '좀 친한 사이'로. 서서히 마음을 열고 정을 나눈다.
내 앞에 정을 다시 한번 다정히 느낀다. 다정한 사람이 가까이 있어 더없이 행복한 저녁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