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책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들 학교에 오랜만에 왔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사실 나는 이제 이곳이 더는 딸의 학교가 아니라는 것에 더 낯선 것일지도 모르겠다. 딸이 7살 때 이사 와서 병설 유치원부터 다녔으니 지난 7년간 꼬박 다녔던 초등학교였다. 지난해 딸이 6학년일 때 아들이 입학했다. 1년이라도 같이 학교 다니는 게 어디냐며 좋아했었다. 애기 때 누나를 따라 여기까지 유모차에 실려 다녔던 아들은 현재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아들이 입학하고 나는 처음 일주일간만 따라가다가 딸에게 동생을 딸려 보냈다. 딸은 2학년 때까지도 내가 매일 학교에 데리고 다녔으니 아들은 그냥 거저 학교 보내는 것 같았다. (나야 고맙지!)
“얘들아, 학교 잘 다녀와!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자!”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나는 서둘러 집으로 들어와 현관 바로 옆 창문에 의자를 대고 그 위에 서서 곧 아파트를 빠져나갈 두 아이를 기다렸다. 우리 집이 아무리 꼭대기 층이라 해도 몇 분도 채 걸리지 않는 그 시간이 참으로 길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두 아이의 까만 머리가 나타나면, 까만 머리 둘이서 나란히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고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이게 무슨 감정인 건지 주책인 건지 도통 설명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엄마가 된 후로 나는 눈물이 많아졌다는 것과 그만큼 나이도 들었다는 것이다.
등굣길에 딸은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다녔더랬다. 속속들이 제보가 들어왔다. 어떤 동료 엄마는 고맙게도 사진까지 찍어 준다. 길에서 마주치면 한 마디씩 했다. 너무 보기 좋다고! 어쩜 두 남매가 사이가 그토록 유별나냐고! 역시 첫째는 딸이 최고라고! 첫째 아들은 아무 소용없다고 동생한테 큰소리만 칠 줄 알지 동생을 챙길 줄은 모른다고. 첫째 딸을 둔 나를 그렇게나 부러워했다. 실상은 우리 집 남매도 다른 집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 남매일 뿐인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왠지 흐뭇해 마지않았다.
솔직히, 두 아이를 키우면서 어떻게 해야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나는 세심한 노력을 해왔다. 특히 이 두 가지는 꼭 유념했다. 하나는 누나나 동생이라는 명목으로 설득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누나니까 봐줘, 누나니까 네가 참아, 동생이니까 양보해, 동생이니까 네가 먼저 사과해. 이런 식의 말들은 자제했다. 서로의 역할에 억울한 감정이 생긴다면 그 역할을 있게 한 상대를 미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서로를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미워하지는 말자는 취지였다. 다른 하나는 둘이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인데 TV나 스마트폰 사용을 통제했다. 그런 재미나는 기기들을 언제든지 접할 수 있다면 둘은 굳이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화합하여 어울려야 하는 그 번거로운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딱히 할 게 없다면 둘은 어떻게든 같이 어울려 놀 수밖에 없다. 단점은 그 뒤처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 결국 엄마의 몫으로 남을 테지만, 내가 이러려고 집에 있는 것이니 기꺼이 감수했다.
물론 현재 우리 아이들은 더 이상 같이 놀지 않는다. 첫째가 중학생이 되면서 완전히 레벨이 달라진 데다 둘째도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친한 친구들 무리가 생겼다. 전엔 주말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어디 가서 어떻게 놀려야 하나 궁리했지만, 요즘엔 그렇지 않다. 첫째는 이미 주중에 친구들과 주말 약속을 꽉 채워 잡고, 둘째도 나름 저 친구들과 게임 약속을 하고 축구를 하러 나가고 아파트 수영장에도 같이 다닌다. 덕분에 주말에 우리 부부는 육아로부터 거의 자유로운 편인데 가끔 난 아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딸이 고만할 때는 내가 한참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딸이 워낙 낯을 많이 가려서도 그랬지만 다 함께 이 아파트 저 아파트 놀이터 순행을 다니고 딸과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따로 집으로 초대해 놀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들은 벌써 스스로 같이 놀 친구들을 물색하고 약속을 잡고 알아서 시간을 보낸다. 여전히 영상매체의 통제 아래 있는 아들은 놀 친구도 없고 정 할 게 없으면 혼자서 수영장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런 아들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짠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엄마의 마음이다.
오늘은 아들 일로 학교에 왔다. 딸이 여기 없다는 걸 한 번 더 새긴다. 둘째의 엄마는 여유가 있어서 좋은데 그만큼 느슨해져 노력을 좀 덜 하게 된다. 첫째 때 자기의 욕심과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고 힘쓰던 것을 거의 내려놨다고나 할까. 그나마 내가 아직 애쓰는 것이 하나 있다면 학교 도서관 사서 봉사 활동이다. 이름하여 ‘책 사랑회’ 어머님이시다. 3월에 한 번 봉사한 뒤로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빠져 시간을 내지 못했었다. 더구나 아들은 엄마가 학교 도서관에 온다고 해서 엄마를 보러 도서관에 찾아오는 그런 아들도 아니었다. 딸이 고학년이 되면서 관두었던 사서 봉사를 작년에 아들이 신입생이 되면서 다시 신청했었다. 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활동이라 여겼다. 당연하게도 아들이 학교 도서관에 자주 찾아와 책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내가 첫째 때 그랬던 것처럼, 아들이 원할 때마다 책을 읽어주지 못해서 그런지 아들은 어느 순간부터는 책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 둘째의 엄마는 마음엔 여유가 있어도 몸은 그렇지 않다. 아이가 둘이 되니 집안일이 두 배로 늘고 다른 집안일은 미뤄두더라도 설거지는 일단 무조건 되어있어야 한다. 첫째 때는 설거지를 쌓아두고서도 책을 읽어줬지만 둘째 때는 그러지 못했다. 아들이 책 읽어 달라고 엄마 다리에 붙으면 “엄마가 설거지만 다 하고 읽어줄게.” 하고 돌려보낸 것이 다른 집안일을 더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거나 아니면 아들은 이미 책은 어딘가에 내팽개쳐두고 다른 시끄러운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했다. 첫째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어주고 잤지만 둘째는 그럴 수 없었다. 다음 날 누나의 일정에 맞춰 일찍 잠들어야 했다. 첫째는 그렇게 전적으로 저의 스케줄에 맞출 수 있었지만 둘째는 누나의 일정과 엄마의 집안일에 치여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안에서 저가 맞추고 알아서 적응해야 했다. 아마 그래서 보통 둘째들이 자립심이 있고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게 아닐까.
작년에, 내가 “엄마 오늘 학교에 도서관 봉사 가니까 쉬는 시간에 놀러 와!” 하고 학교에 보내면, 딸은 친구들을 데리고 꼭 찾아왔는데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들 친구들은 보여도 아들은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나중에 물어보면 노느냐고 깜박했다고 한다. ‘그랬구나, 아들이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하고 있구나.’ 하면서도 엄마는 은근히 서운함을 느꼈다. ‘얘는 엄마 생각은 안 하나. 엄마가 보고 싶지도 않나.’ 몇 번 그러고 나서 사실 올해는 봉사를 그만둘까 싶었다. ‘그래도, 그래, 올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아들이 대뜸 엄마에게 물어오는 게 아닌가.
“엄마, 엄마 이제 학교 도서관 안 와?”
“왜? 엄마 가도 너 도서관 안 오잖아, 흐흐흐”
“아니야, 엄마! 나 요즘 매일 도서관에 가는데! 엄마가 한 번 오면 좋겠어.”
요렇게 다부지게 요청하는 게 아닌가.
“뭐라고? 우리 아들이 매일 도서관을 간다고? 정말로! 뤼얼리?”
그러고서 나는 바로 다음 달 도서관 봉사를 예약했다. 아들이 도서관을 매일 같이 다닌다는데, 엄마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는데, 엄마는 감격스러운 나머지 없는 시간도 만들어 낼 판이었다.
“어떻게 오셨죠?”
“도서관에 사서 봉사하러 왔어요.”
“여기 연락처 적으시고 출입증 받아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학교 계단을 오른다. 딸이 저학년일 때는 학교에 참 자주 다녔었다. 수개월에 걸쳐 학부모 연수를 마치고 책놀이 지도사 자격증을 따고, 학부모를 위한 강의가 있을 때마다 웬만해서는 빼먹지 않고 참가했었다. 그렇게 첫째의 엄마는 열성을 다했다. 내향형 엄마의 열성은 학교 위원회와 같은 대외적인 활동이 아니라 그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좋은 엄마로서의 역량을 갖추고자 꾸준히 노력하는 거였다. 그런 열성은 이제 그만 차치해 둔 둘째의 엄마가, 아들을 보러 학교에 왔다. 어쩌면 아들은 자기가 매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과연 아들이 도서관에 있을까. 엄마를 보러 올까. 친구들이랑 노느라 또 깜박하진 않을까. 이게 뭐라고 떨리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들어간다. 서가 안쪽으로 아들을 찾아본다. ‘우리 아들 어디에 있나… 없나, 안 왔나, 벌써 왔다 갔나…’ 그때 맨 끝 소파 한가운데 친구들 사이에 끼어 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는 아들이 눈에 띄었다. “어머나! 아들! 엄마 왔어. 너 진짜 도서관에 와 있네, 책을 읽네, 우리 아들이! 뭐 읽고 있어?” 엄마는 부산을 떨며 아들을 반긴다. 아들은 그냥 덤덤하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는 만화책을 대출하지 못하니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짬짬이 여러 가지 만화책 시리즈들을 야금야금 읽었던 거였다. 아침에도 봤고 집에서도 매일 보는 아들이 여기 학교 도서관에서 보니까 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종이 울리고 교실로 돌아가는 아들이 아쉬울 만큼.
나는 도서관 안내 데스크에 앉아 아이들 책을 대출해 주고 반납을 도와준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반납한 책들과 아이들이 읽다가 만 책들을 서가 순서에 맞게 정리한다. 중간에 책을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읽고 싶은 책을 찾아 헤매다 어렵게 발견하면 아이와 나는 서로 어찌나 기쁜지! 우리가 지금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게 무색하리만치 금세 마음이 통하고 만다. 이 시간만큼은 내가 진정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힘껏 도움이 되고자 한다. 아이들에게는 최대한 밝고 상냥하게 대한다. 아이들 스스로 저마다 소중한 존재로서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대출증에 기재된 아이들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며 반납할 날짜를 알려준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나와 눈을 마주치면 아이는 절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우리 인간은 원래 이렇게나 다정한 존재다. 우리 사이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본능적으로 교감을 이룬다. 이 또한 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늘 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 설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은 우리 아들에게도 가 닿았다. 내가 딸에게 가장 잘한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 딸을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웠다는 데 있다. 그것을 몹시 자부하는 엄마로서 아들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다. 어느새 아들은 틈틈이 도서관에 들르는 아이가 되었다. 책을 즐기게 되었다. 책에 한눈을 파는 아이가 되었다. 비록 엄마가 자기가 원할 때마다 책을 읽어주지는 못했지만, 누나만큼 밀도 있게 자기를 챙겨주지도 않지만, 책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은연중에 통한 것이다. 엄마가 무슨 마음으로 자기 학교 도서관에 봉사를 오는지 아들은 감지한 것이다. 엄마가 책 읽어라, 책 읽어라, 주문하지 않아도 책이 좋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일 테다. 늘 책을 가까이 두는 엄마를 보면서, 시간을 내서 도서관에 다니는 엄마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깊숙이 새겨 넣은 것이다. 저절로 배운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말이 아니라 부모가 하는 행동을 보고 배운다고 한다. 무엇이 진짜인지 아이들은 태생적으로 알고 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행동으로 드러나면서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해 주는 것은 아닐까.’
아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한 번 더 도서관에 들러 엄마에게 인사하러 왔다. 나는 아까 챙겨둔 (책 사랑회 어머님을 위한) 간식을 아들에게 건네줬다. 사실 내 앞에 이 먹보 아들이 바로 요런 걸 받아먹고 싶어서 지금 여기 다시 찾아왔다는 것을, 엄마는 눈치채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힘은 무슨! 아들에겐 그저 이 새콤달콤한 알록달록 요 젤리가 최고일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