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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팀장 Jun 06. 2022

'맛있다'로는 부족해.

'맛무새'를 탈피하자.

 나는 TV 리모컨을 조작할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숨기고 산다.

 언제든 맘만 먹으면 유려한 버튼 터치로 입맛에 맞는 프로를 얼마든지 골라 볼 수 있지만 그 힘을 철저하게 숨기고 산다. 그리고 그 힘은 모두 잠든 후에 최대한 은밀하게 발휘된다. 거실 벽에서 안방까지의 거리와 벽의 두께를 계산하여 안방에서 자고 있을 와이프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나는 알아먹을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의 볼륨 조절 능력까지 함께 말이다.

 나야말로 바로 '힘 숨 찐'이다. 훗~


 철저하게 힘을 숨기고 사는 관계로 우리 집 거실에 TV 소리가 퍼져 나가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다.

 와이프는 TV 시청을 그리 즐기는 스타일은 아닌 데다가 예능을 즐겨 보는 스타일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에 일요일 저녁 SBS에서 방영하는 <집사부일체>는 단 한 번도 보지 않던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리모컨을 손에 쥔 와이프가 TV를 틀자 <런닝맨> 엔딩과 함께 곧이어 <집사부일체>에 김영하 작가가 나온다는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김영하 작가가 누구인가?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을 꼽는데 절대 빠지지 않는 최고의 작가 아닌가?

 평소 책을 사랑하고 김영하 작가의 말과 을 좋아하는 와이프의 취향에 딱 맞는 프로였다.

 그래서 나도 봤다.  

 아, 물론 나도 책도 사랑하고 김영하 작가의 말과 글도 좋아한다. 진짜다.


 김영하 작가는 누구나 책 한 권쯤은 쓸 수 있으며 주변을 잘 관찰하고 오감을 활용하면 좋은 표현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집사부일체> 멤버들과 부산의 어느 횟집에서 회를 먹으며 '맛있다'를 연발하는 그들에게 그 맛을 다른 말로 표현해보라는 미션을 던졌다.

 그때 해삼을 먹은 이승기의 표현이 참으로 신박했다.


남의 잇몸을 씹는 느낌이에요.


 '와! 쟤 뭐지??' 하는 느낌과 동시에 역시 저래서 연예인인 건가 하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사십 평생 남의 잇몸을 씹어본 적은 없지만 딱 듣는 순간 어떤 느낌인지 확 느껴지더라.




 요즘 와이프와 아이들이 유튜브 채널 <영국 남자>를 자주 본다.

 영국 남자인 조쉬와 올리가 한국 문화와 음식을 소개하는 구독자 5백만에 육박하는 채널로 나도 몇 번 봤는데 영국인이 한국을 소개한다는 컨셉 자체의 흐뭇함이나 차별성과는 별개로 일단 재미있다.


 그리고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부분은 한국 음식을 맛본 영국인들이 그 맛을 표현하는 방식과 풍부한 어휘이다.

 와이프가 아이들에게 그 채널을 보여주는 의도도 바로 그것인데, 그들은 그저 '맛있다', '좋다'와 같은 표현은 하지 않는다.

 소이 갈릭 치킨을 먹은 영국 고등학생은 이런 식으로 그 맛을 표현한다.


소이 갈릭 치킨이 세계 평화를 이루고 있네요.

 와! 난 아마 열두 번 죽었다 깨도 저런 표현은 못할 것 같다.

 내가 하는 맛 표현이란 "맛있다."가 98프로 정도고 "아흐, 국물 죽인다."쯤이 1프로를 차지할 것이다.  

 나머지 1프로는 너무 매운 음식을 먹을 때 "아! 짜증 나게 맵네!"고.

 그나마 맵찔이라 "맛있다."가 99프로는 아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유튜브 채널 <체인지 그라운드>의 신영준 님과 <신사임당> 주언규 님이 함께 쓴 <인생은 실전이다>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이 '허접스럽게 들리지 않는 3가지 고급스러운 말투'였는데 그 세 가지 말투 중에서도 으뜸은 '묘사를 구체적으로 하라.'이다.

 주말에 거금을 들여 머리를 하고 출근했는데 "어? 머리 했네?"하고 지나가는 김 부장과 "와, 머리 하니까 확실히 좋아 보인다. 얼굴이 훨씬 밝아 보여." 하는 박 차장이 있다면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가겠는가?


 풍부한 표현은 구체적인 묘사에서 나온다.

 그리고 구체적인 묘사는 그 대상에 대한 관심과 공감이 기본으로 깔린 상태에서, 평소에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많은 표현들을 접해야 가능한 것이다.

 가수와 연기자로 활발하게 활동한 이승기는 세심한 감정선으로 먹고사는 연예인으로 십수 년간 단련됐기 때문에 해삼을 씹으며 남의 잇몸을 느낀 것이고, 영국의 고등학생들은 어려서부터 몸에 밴 자유롭고 풍부한 표현과 미지의 음식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만나 세계 평화를 지키는 소이 갈릭 치킨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저런 풍부한 표현에 서툴고 공감 능력도 조금 떨어지는 대한민국 40대 아저씨와 그의 두 아들들은 매일 영혼을 아 넣은 밥상을 받으면서도 고작 할 줄 아는 말이 '맛있다'였던 것이다.

 그저 '맛있다', '맛있다' 노래를 불렀다. '맛무새'도 아니고.

 식당에서 계산하고 나오면서 하는 "잘 먹었습니다."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표현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식상하고 힘 빠졌을까.


 "와~ 이거 푸틴이 먹으면 당장 전쟁 끝내겠는데!"

 "난 죽기 전에 딱 한 가지만 먹고 죽으라면 이거 먹고 죽을 거야."

 항마력 딸려도 내일부터는 이렇게 표현을 좀 해보자.

 주접이 풍년이네, 이 인간이 왜 이럴까 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떤가.


 그래도 맛무새보단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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