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아파트 1층 우리 집으로 이사 오면서 한 가지 결심했던 게 있다.
가사노동에 뺏기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문명의 혜택을 최대한 누리고 남는 시간은 자기 계발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쓰기로 말이다.
물론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남는 시간의 대부분은 또 다른 문명의 혜택인 TV와 너튜브를 보는데 쓰긴 했지만.
이사 오기 전 빨래 건조기를 통해 신세계를 맛보고 삶의 질이 수직 상승하는 경험을 했던 우리는 2년 전 이 집으로 입성하면서 삶의 질 유리천장을 뚫기 위해 '신세계 3대장'을 구매하기로 했다.
이삿날 설치기사님께서 배관이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열심히 설명해 주셨지만 끝내 알 수 없던 어떤 이유로 설치를 포기했던 음식물 처리기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머지 2대장인 로봇 청소기와 식기 세척기를 영입하며 이제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스타일러뿐이었다.
로봇 청소기의 활약은 그야말로 천군만마였다.
전보다 넓어진 집 구석구석을 누비며 먼지를 빨아들이고 걸레질까지 쓱싹쓱싹 하는 녀석은 두 개의 심장을 지닌 것 같았다. 지치지도 않고 온 집안에 본인의 히트맵을 그리는 녀석을 보며 박지성을 바라보던 퍼거슨 경의 마음이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청소를 시작하고 끝내는 순간마다 인사를 건네는 예의바름까지.
청소는 언제나 즐겁다는 무한 긍정의 마인드까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녀석은 우리 집 중원의 에이스다.
반면에 식기세척기의 활약은 미미하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양이 많을 때, 너무너무 피곤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때가 아니면 출전 빈도가 상당히 낮다. 거의 대부분 벤치만 달구고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거액을 들여 영입했으니 당연히 선발 출장의 기회와 함께 녀석에게 맞는 전용 세제와 린스 같은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출장할 때마다 녀석의 퍼포먼스는 내 기대치에 한참 모자랐고 점점 눈 밖에 나더니 요즘은 거의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와이프와는 좋은 호흡을 보여주고 있는데 나와는 합이 영 안 맞는다.
건조기에서 갓 꺼낸 뽀송뽀송한 빨래를 개면서 '역시 요즘처럼 습할 때는 네가 최고야.' 하며 열심히 뛴 후에 쉬고 있는 로봇 청소기와 정답게 눈을 맞추고 저 멀리 있는 식기 세척기를 바라보니 참 못나 보였다.
2년 전 영입 당시에는 식기 세척기가 가장 큰 기대를 받았었다. 로봇 청소기는 곁다리였고 영입의 핵심은 시기 세척기였단 말이다.
도대체 이 녀석은 어쩌다가 이렇게 미운털이 박힌 걸까...
그래서 한번 생각해봤다. 녀석의 문제가 뭔지.
첫째, 손이 너무 많이 간다.
아무렇게나 빨래를 때려 넣어도 빙글빙글 돌려가며 골고루 잘 말려주는 건조기나 버튼만 눌러주면 알아서 돌아다니는 로봇 청소기와 달리 녀석은 식기의 위치를 하나하나 지정해서 각을 잡아줘야 일을 한다.
기름기가 많거나 말라서 딱 붙어있는 것들을 그냥 집어넣으면 고스란히 되돌려주기 때문에 초벌 설거지를 해줘야 하는 것도 애로사항이다. 초벌을 할 거면 그냥 내가 하고 말지.
둘째, 질척거리는 건 딱 질색이다.
녀석은 설거지를 끝내고 반나절이 지난 후에도 질척거린다.
컵을 뒤집어 놓으면 바닥 위에 흥건하고 물줄기에 얻어맞고 똑바로 서게 된 가벼운 플라스틱 컵은 누가 완샷을 불렀는지 너무 찰랑찰랑해서 넘치기 전에 츄르릅 마셔줘야 할 태세다.
사람이고 빨래고 그릇이고 뽀송뽀송한 걸 좋아하는 나와는 참 안 맞는다.
셋째, 내가 설거지를 너무 좋아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는 노래 가사를 내가 다시 쓴다면 '요리와 청소와 설거지 중에 그중에 제일은 설거지라'라고 할 것이다.
요리는 어렵고 청소는 고되고 설거지는 즐겁다.
요리는 와이프를 넘어설 수 없고 청소는 로봇 청소기를 당해낼 재간이 없고 설거지는 내가 최고다.
그래서 나는 설거지를 좋아한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창을 통해 보이는 집 앞의 풍경은 언제나 좋다.
맨손으로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서 그릇을 닦을 때 나는 뽀드득뽀드득 소리와 수세미가 그릇을 문지를 때 손에 전해지는 은근한 타격감은 전성기 타이슨의 풋웍처럼 경쾌하다.
더운 여름날 맨손에 닿는 찬물의 시원함은 생각보다 꽤 강력해서 땀이 쏙 들어간다.
뽀송뽀송 잘 마른 그릇들을 차곡차곡 정리해서 제 자리에 놓는 것은 일종의 루틴처럼 편안함을 안겨준다.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 핸드폰으로 합법적으로 야구를 볼 수 있어 좋다. 그때만큼은 떳떳하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페이스톡 하는 아들 녀석들이 아빠는 뭐하냐는 질문에 '아빠는 설거지하고 있어요.'라 대답하고 장인어른이 껄껄 웃으시는 것도 나름 기분 좋다.
저녁 설거지를 마친 후에 싱크대 물기를 훔치고 행주를 빨아 걸어 놓으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쳤구나 하는 안도감이 느껴져 좋다.
식기 세척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내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이유가 너무 많아 내 눈에 안 찼던걸 녀석의 탓으로 돌렸던 건 아닐까.
정말 손 안 가고 언제나 뽀송뽀송한 식기 세척기가 나온다고 해도 내 눈에 차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 식기 세척기는 그냥 건조대로 쓰자.
어떤 식으로든 잘 쓴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니까 이제 식기 세척기는 건조대로 받아들이고 미워하지 말자.
모든 건 다 나름대로의 쓰임이 있는 거니 그냥 그 쓰임대로 잘 쓰면 된다.
그게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