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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팀장 Jun 14. 2022

중고서점 플렉스

역시 책은 박스채로 사야 제 맛이지.

 마냥 화창하다고 하기엔 꽤나 후끈거리는 기운이 느껴지던 일요일 대낮, 몇 시간을 밖에 서 있느라 달궈질 대로 달궈진 자동차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온 가족이 출동한다.

 어디로? 중고서점으로.


 주차를 하고 한 층을 올라가니 서점 입구의 요술 램프가 반겨준다.

 쓱쓱 문지르고 주문을 외우면 당장이라도 램프의 요정 지니가 튀어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 요술 램프는 볼 때마다 아주 살짝 설레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래서 그런가 화장실이 가고 싶다.


 입구까지는 단체 행동이지만 일단 입구에 들어서고 나면 개별 행동에 들어간다.

 '각자 원하는 책을 쓸어 담고 이만하면 됐다 싶으면 다시 집결한다.' 따위의 합의도 없이 뿔뿔이 흩어진다.

 누군가는 도서 검색용 PC로, 누군가는 아동도서 코너로, 누군가는 경제 코너로, 누군가는 화장실로.


 많은 이들이 그랬다. 가족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같은 경험을 공유하며 공감대를 쌓아나가야 한다고. 

 그런데 그게 말이 쉽지 나이도 성별도 성격도 각기 다른 4인 가족(무미건조한 40대 남자와 감성 충만한 40대 여자, 그리고 변화구 투수 같으면서 엉덩이가 무거운 초5 사내아이와 30분 이상 지속되는 놀이는 이미 지루한 것이라는 돌직구 일변도의 초3 사내아이의 조합)이 공통적으로 즐거운 경험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흔한가.


 여행을 가거나 놀이공원을 가거나 맛있는 요리를 먹으러 가는 것처럼 웬만해선 싫어하기 힘든, 그리고 돈이 많이 드는, 그래서 자주 하기 힘든 것들 뿐이지 일상생활에서 모두가 즐겁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나머지는 즐거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은가.

 <신비 아파트>를 보며 즐거울 두 초딩을 위해서는 두 명의 40대가 희생해야 하고, 한번 시작하면 기본 2시간은 걸리는 <테라포밍 마스> 같은 보드게임을 하려면 돌직구 초3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 램프의 요정은 살지 않는 중고서점에 오면 모두가 즐겁다. 아무도 희생할 필요가 없다.

 저마다 갖고 싶은 것들을 고르고 다른 가족 구성원의 태클 없이 그리고 스스로도 죄책감 따위 1도 없이 떳떳한 소비를 할 수 있으니 즐겁지 아니한가.

 각자가 원하는 옷을 산다고 하면 수십 군데를 들락날락하느라 체력은 소진되고, 내 차례가 아닐 때는 지루함과 짜증이 솟구치거나 중간에 낙오자가 발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렁주렁 쇼핑백을 걸고 집에 돌아갔을 때 만족감에 뒤따라 스멀스멀 올라오는 죄책감과 후회 때문에 뒤끝이 별로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는 단 한 시간 내에, 그것도 한 자리에서 모두가 만족스럽게 뒤끝 없이 플렉스 할 수 있으니 요술 램프가 따로 없다. 


 비록 마이너 한 취향 탓에 내가 찾던 책들은 모조리 없어 중고서점 플렉스에서 내 지분은 5%밖에 되지 않았지만 요술 램프가 그려진 박스에 책을 가득 담아 트렁크에 실을 때의 기분은 꽤나 좋다.

 집에 돌아와 오늘 사 온 책들을 쌓아놓고 기념 촬영을 해서 인스타에 올리면 인친님들이 좋아요를 팍팍 눌러주겠지 하고 상상하는 것도 즐겁고, 아무렇게나 앉아서 자기가 고른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강아지를 보고 있는 기분도 꽤 괜찮다.(저 위의 가족 구성원 중 무미건조한 40대 남자는 무미건조하지만 관종인 40대 남자로 수정한다)


 '나는 금리로 경제를 읽는다.', '밴 버냉키, 연방 준비제도와 금융위기를 말하다.' 같은 내가 찾던 책들이 없던 것도 한번 사면 중고로 내놓지 않을 정도로 좋은 책들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라 좋다.

 그리고 내가 가는 길이 남들이 많이 가지 않는 길이라는 것도 증명된 것 같아 그 또한 만족스럽다. 

 오늘의 '중고서점 플렉스'가 언젠가 '그냥 서점 플렉스'를 할 수 있는 길에서 만난 경유지라는 생각에 만족스럽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플렉스다.

 역시 책은 박스채로 사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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