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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문화재단 Jul 31. 2018

번역가 정영목

좋은 번역은숨겨진 빙산까지보여준다

‘번역’이란 무엇일까.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정영목 번역가(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번역학과 교수)는 이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해줄 만한 이다. 얼마 전 타계한 미국 현대문학가 필립 로스를 비롯해 조제 사라마구, 커트 보니거트, 코맥 매카시, 존 업다이크, 알랭 드 보통 등 빼어난 작가의 소설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또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 마사 누스바움의 <인간성 수업> 등 비문학 서적도 상당수 번역했다. 원어민이 읽어도 수월하지 않을 작품을 그는 다른 언어의 글로 오롯이 옮긴다. 1991년부터 27년 동안 이렇게 번역한 책이 200권을 넘는다. 번역만 했던 그가 최근 책 2권을 냈다. 그동안 발표한 번역론을 모은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와 소설을 번역하고서 쓴 칼럼을 묶은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이다.

책을 출간한 6월을 기점으로 여러 인터뷰가 나왔지만,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답에는 적절히 이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어 정영목 번역가를 만났다. 남의 말을 옮긴다는 의미에서 인터뷰도 번역의 한 종류라 할 수 있다.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더 잘 번역하고자, 기자로서 의견을 넣어 서술하지 않고 질문하고 답을 받는 형태로 글을 싣는다.



1991년부터였죠. 번역 일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대학을 졸업하고 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 그러면서도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과외와 번역이 있더라고요. 과외는 그다지 재미없었어요. 번역은 나름 재미있었고요.



번역의 재미라는 게 어떤 건가요?

번역가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원문을 이해하는 재미라 생각합니다. 글의 의미를 파악하고 깨닫는 재미라 할 수 있습니다. 글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글 속의 작은 글들의 관계가 눈에 보여요. 글의 의미를 바꿀 우리말을 고르는 일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번역을 하려면 글을 아주 자세하게 읽겠군요.

맞아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번역을 시작하면 독서라는 취미를 잃게 된다”고 농담하곤 합니다. 자꾸 분석하고 따져야 하잖아요.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일과 비교해보세요.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하면서 보면 재밌습니다. 그런데 내가 영화의 제작자나 스태프라면 또 다르겠죠. 번역을 하다 보면 글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일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길을 걷다가 ‘아! 지난번 번역하다 막힌 게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깨닫기도 합니다. 뇌의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기계가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지금은 괴로워도 나이가 들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려나요? (웃음)



번역은 1년에 몇 권쯤 하고, 어떻게 하십니까?

1년에 평균 3~4권 정도 합니다. 책의 분량이나 난도에 따라 다릅니다. 교수가 되고도 예전 프리랜서로 활동할 때만큼은 하고 있어요.



번역가로서 감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인가요?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은 번역이 본업이라 생각합니다. 전업으로 번역 일을 하다 2011년부터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통번역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여전히 번역이 제 생활을 지배합니다. 번역할 시간이 줄었지만, 매년 3~4권 정도는 작업하게 되더군요. 그나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번역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통번역대학원 강의는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연구 쪽이 아니라 실무 쪽을 많이 가르칩니다. 일정 부분을 번역하도록 한 뒤 학생들이 서로 돌려보고 토론하게끔 합니다.



번역 수업에 토론이 중요한 이유는 뭔가요?

학생들은 지금보다 나아지는 데에 가장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어떻게 번역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객관적으로 봐야겠죠. 글쓰는 사람들도 ‘나중에 묵혀놓고 보라’고 하잖아요. 거리를 두고 보라는 의미겠죠. 같은 텍스트를 번역했는데, 남은 어떻게 번역하고 나는 어떻게 했는지를 보고 토론하는 겁니다. 이게 번역 실력을 가장 빠르게 키울 수 있는 방법이더군요.



번역 작업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십니까?

예전에는 집에서도 하고 출판사 인근에서도 하고 그랬어요. 친구들과 사무실을 얻어 함께하기도 했죠. 번역하는 친구들은 아니었고요. 그냥 사무실 공간을 같이 쓰는 식으로요. 저는 번역을 할 때 혼자서 막 골몰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다만, 교수가 되고 나서는 연구실에서 혼자 작업하는 일이 잦습니다.



소설을 많이 번역하셨는데, 작가에 관해 공부를 따로 하시나요?

아닙니다. 초벌 번역에서는 될 수 있으면 관련 정보를 배제하고 봅니다. 원서 한 권이 지닌 완결된 범위에서 우선 일합니다. 원서의 테두리 안에서, 죽어라고 파고듭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누구며, 어떤 생을 살았고, 다른 이가 작가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가급적 보지 않습니다. 특히 작가에 관한 평가는 의도적으로 아예 피합니다.



배경지식이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번역은 발가벗고 작가와 목욕탕에서 만나는 일’이라고. (웃음) 그런데 이게 뜻밖에 재밌습니다. 작품 내부에서 번역가와 작가가 서로 생각을 주고받는 셈인데, 완결성이 있는 작품을 만나면 정말 재밌죠. 그런데 내가 상대방에 관해 편견이나 오해가 있으면 제대로 마주하기 어렵잖아요. 예컨대 헤밍웨이는 일반적으로 마초적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실제 삶도 그런 면이 있었고요. 그런데 직접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보니 너무 달랐습니다. 몇몇 작품은 굉장히 섬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입견이 너무 강하면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번역하는 이들이 이 단계를 잘 이겨내지 못하고 흔들리면 실패하기도 하죠.



초벌 번역이 끝난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교정을 보거나 출판사에서 함께 살펴볼 때는 주변 정보도 보는 편입니다. 번역 이후 흥미가 생겨 스스로 찾아보기도 합니다. 예컨대 필립 로스는 번역 이후 관심이 생겨 그의 전기도 찾아 읽었습니다. 번역을 하다 보면 작가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커지게 마련이니까요.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번역 실력이 나아지죠. 목욕탕에서 만났는데 등에 있는 흉터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실패한 번역이지만, 나중에는 ‘저 사람 어디가 좀 아픈 거 아닐까?’ 하는 수준까지 올라간다고 할까요. (웃음)

정영목 번역가가 번역한 책들



번역 작업이 가장 힘들었던 작가는 누구였나요?

존 업다이크예요. 그의 토끼 4부작에서 1부를 번역할 때 정말이지 작품과 ‘씨름’을 했어요. 산맥을 봐야 하는데, 산 하나만 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완전한 모습을 보지 못했고, 작가의 의도를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존 업다이크는 긴 세월 동안 자기 변모를 많이 겪은 작가이기도 하죠. 1부를 번역할 당시 2~4부가 나오지 않은 터여서 결국 1부를 번역하고는 ‘작가의 생각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한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런 생각마저 들더군요. ‘4부까지 모두 번역한 다음 다시 1부를 번역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존 업다이크는 <달려라, 토끼>(1960)로 시작해 <돌아온 토끼>(1971), <토끼는 부자다> (1981), <토끼 잠들다>(1990)를 냈다. 그는 토끼 4부작으로 20세기 후반 미국 중산층의 삶을 그렸다. ‘토끼’는 주인공 해리 앵스트롬의 애칭이자 별명이다.)



그 정도로 어려웠다니,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번역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냥 영어를 한글로 바꾸면 되는 거’라고. 그런데 말은 촘촘하지 않고 성긴 특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자님을 만나고 나서 제 친구 3명에게 설명해줄 때 ‘얼굴이 둥그렇고 안경을 쓰고 있고 코와 입은 어떤 모양이더라’고 알려준다 한들, 3명 모두 똑같은 사람을 떠올리진 않겠죠. 번역가는 이런 틈새를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번역의 승부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좋은 번역이란 어떤 것인가요?

번역은 빙산을 보여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일부는 위에 솟아 있지만, 아래는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요. 말로 빙산을 보여줘야 하는데, 가장 풍부한 언어로 밑바닥까지 모두 긁어 보여줘야 합니다. 언어의 표현은 쉽게 말해 녹차 티백과도 같습니다. 투명한 물에 티백이 들어가면 녹색의 물로 바뀌죠. 그 녹색을 옅게 할 수도, 짙게 할 수도 있습니다.



번역가의 능력에 따라 결과물도 달라진다는 거군요.

그렇죠. 번역가가 작품을 이해한 만큼 번역 결과도 맞춰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일차적인 뜻의 단어만으로는 아무리 모아봐야 빙산을 제대로 보여주기 어렵습니다. 원서의 텍스트에는 사실 많은 정보가 함축돼 있습니다. 같은 번역을 하더라도 단어의 의미 자체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굳이 원서에 있지도 않은 말을 번역가가 덧붙여 설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단어는 의미를 뜻하는 ‘코어’도 있지만, 의미의 다양함을 뜻하는 ‘범위’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작가가 ‘파란색’이라는 단어를 썼을 때, 도대체 어떤 파란색이냐는 겁니다. 그냥 ‘파랗다’고 옮기면 어떤 파랑입니까? 여기에 번역가의 아이디어가 담겨야 합니다. 또 이 단어를 원서의 맥락에서 제대로 파악하고 작가의 뜻이 잘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까지 담아내는 번역이 정말 좋은 번역 아닐까 생각합니다.



반대로 나쁜 번역은 어떤 것일까요?

우선 단어의 뜻 자체를 틀리는 거죠. 원래 글은 읽다 보면 틀려도 말이 되는 거 같고, 그래서 그냥 지나가버리기도 합니다. 출판사에서 원고를 다시 보는데도 못 잡아내는 사례도 있잖아요. 소설은 배경에 관한 이해를 제대로 못하는 데서 오류가 나기도 합니다.



번역의 가독성을 두고 논란이 심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가독성만 중시한 번역은 이발소에 걸린 그림과 같다”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어려운 책이 나쁘냐, 그건 아니잖아요. 어렵지만 번역을 잘해서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책도 있고요. 가독성이 좋은 번역의 기준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을 잘 살리는 일은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만 쓰는 일도 오히려 퇴행적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어떤 작가가 새로운 문장을 썼는데, 번역가가 읽기 편한 것으로 고쳐버리는 일은 옳지 않죠.



번역가가 작가의 새로운 시도를 잘 파악해야겠네요.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무언가가 튀어나왔다고 대패로 밀어 매끄럽게 만드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작가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 했고 애써 살렸더니 ‘번역투’라고 매도해버리면 안 됩니다. 어차피 번역은 다른 나라 말을 우리말로 바꾸는 겁니다. 언어가 서로 부딪히면 이질적인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번역가는 이것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 고민해야죠. 작가가 실험정신을 가지고 쓴 표현을 익숙한 우리 언어로 무작정 바꿔버리려면 번역을 뭐하러 합니까?



이번에 낸 책에도 그런 주장을 하셨죠.

(책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에는 “외국어가 엉키는 현상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네. 바로 그 부분입니다. 언어는 계속 확장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언어의 충돌입니다. 다른 나라 말이 우리말과 만나면 우리말이 풍부해집니다. 그 결과물을 단순히 번역투라고 비난하면 새로운 시도를 못하게 되고, 국어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도매금으로 넘기게 됩니다. 두 언어가 만나 서로 섞이면서 우리의 인식도 넓어지고 새로운 표현수단도 얻을 수 있습니다.


최근 출간한 2권의 책



관련해서 어떤 사례가 있을까요?

‘자유 간접 화법’을 예로 들어볼까요. 예컨대 ‘나는 영희가 좋다’는 자유 직접 화법이고, ‘철수는 영희가 좋다고 말했다’는 간접 화법입니다. ‘철수는 영희가 좋다’를 자유 간접 화법이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정착이 안 됐지만, 이 화법은 19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시작됐습니다. 서술자가 자신의 주관을 개입할 수 있어 현대소설에서 즐겨 사용했습니다. 우리말로 정리가 잘 안 된 표현을 우리말로 어떻게 바꿀 것이냐, 번역가로선 이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반대로, 번역가가 새로운 문을 열 수도 있습니다. 일본어였다가 한국어로 정착된 ‘민주주의’라든가, ‘자유’, ‘연애’를 보세요. 이 말들이 들어오며 우리의 의식도 확장됐지요.



그동안 좋은 번역에 관한 토론이 많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있는데, 건반을 잘못 누르는 일만 보는 셈입니다. 물론 건반을 제대로 눌러야 하지만, 전체적으로 평가가 더 중요하잖아요. 번역 오류, 문체에 관한 논란이 결국 ‘좋은 번역은 무엇인가?’에 관한 토론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번역계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빈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특히 언론이 선정적인 걸 좋아해 번역의 오류만 짚어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죠. (웃음)



최근 한국문학의 세계 진출이 활발한데요.

아주 좋은 일이죠. 그러면서 또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예컨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놓고 영어 번역이 잘됐다 그렇지 않다 하는 말이 많습니다. 나쁜 번역이 무엇인가에 집중하면서 또다시 좋은 번역에 관한 논의를 가린다는 생각이 들어 우려됩니다. 또 영어 번역 문제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영어로 텍스트를 번역하는 순간, 그 결과물은 영어 텍스트에 자리 잡은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 문학의 파생품인 셈이죠. 일종의 하위범주라고나 할까요.



현재 번역 작업 중인 작품은 무엇입니까?

맨부커상을 받은 조지 손더스의 <링컨 인 더 바르도>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링컨이 병으로 11살 때 세상을 떠난 아들의 묘지에 가서 시신을 꺼내어 안고 오열했다는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입니다.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링컨 아들의 죽음을 영혼들의 시점에서 기록한 굉장히 실험적인 작품입니다.



번역하는 책은 어떻게 고르시나요? 기준이 있으십니까?

그간 작업 내용이 있는지라, 출판사에서 주로 알아서 번역해달라고 책을 주긴 합니다. 읽어보고 뭐든 ‘탁’ 하고 꽂히는 게 있으면 받아들입니다. 목욕탕에서 봤는데, 뭐랄까, 후광이 확 비추는 느낌? (웃음)





 김기중 (서울신문 기자)
사진 최성열
사진 제공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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