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꽃을 좋아하기엔 내가 너무 농익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빨갛게 익어 곧 터질듯한 조직과 조직이 겨우 서로를 붙들고 있는 것 같은 삼십 대를 보내는 나는, 하얗게 또는 분홍빛으로 피는 벚꽃잎에 옛날처럼 기뻐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벚꽃잎의 그 젊음이, 그 순수가, 그 파리함이 이제는 너무 경망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그 호리호리한 꽃들보다는 오히려 거친 나무껍질이나 꽃잎이 떨어진 질은 흙바닥의 아연함에 눈길이 갔다.
비단 벚꽃만이 아니었다. 4월이 되자 아파트 단지 곳곳에 피어난 하얀 철쭉을 보고도 쌀쌀맞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는 사람이 계획하여 가져다 심은, 수의를 입은 것 같은 저 하얀 꽃들이 징그러웠다.
나는 그 생경한 하얀색이, 세상 물정 모르고 피어난 새하얀 그 꽃이 내 안에도 한때 정결한 영혼이 있었으나 이제는 죽었음을 그 맹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날아다니는 꿀벌들이나 보랏빛이 도는 진분홍색 철쭉 꽃잎의 주근깨들은 귀여웠지만 흰 철쭉 편이 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어른이 된 후로 어리숙한 얼굴로 독한 말을 하는 것들은 영원히 미워할 작정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딸아이가 손안에 하얀 철쭉을 올려 내 눈앞에 갖다 두었다. 상처 입은 꽃이었다. 꽃술들은 어디 가고 없고, 다섯 개의 꽃잎 중 하나는 말랐고, 하나는 사람의 손길이 닿아 투명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자세히 보는척하다가 자세히 보고 말았다.
그것은 언젠가 내가 보았던 그 여름 통영의 그 바다처럼 아름답게, 그래, 그저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보는 이 빛과 그때 소녀가 보았던 그 빛이 동일한 것임을 직감했다.
이것은 발끝을 들어 살금살금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면서, 어느 날 문득 그 모습을 드러내 '헤헤 용용 살겠지'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장난꾸러기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느닷없이 나를 놀라게 하고, 어이없는 방식으로 내가 보던 구겨진 세상을 이렇게 빳빳하게 펼칠 리가 없었다
그때는 노을 비친 바다를 통해서 더니, 이번엔 아이 손에 놓인 꽃을 통해서였다.
나는 한참을 서서 그 별 모양 꽃에서 빛나는 바다를 한참 보았다. 그곳이 바로 내 영혼이 사는 곳인지도 몰랐다. 그래, 그럴 것이었다.
나는 고마웠다. 이렇게 빛나는 빛에.
다시 나를 찾아준 이 빛에 나는 잠시 고마워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잊겠지.
그래서 오늘 나는- 글 쓰는 것이 좀 두려워진 나는-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졸작이랑 빛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내가 본 것은 빛! 바로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