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의 나
나는 밤을 걸었습니다. 가로등 불빛이 눈썹을 따라 내려와 여러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그중 아래로 향하던 주황색 불빛은 다른 빛보다 더 굵고 길었습니다. 눈을 감을 때 억세고 꺼칠한 눈썹의 뿌리가 느껴졌습니다. 눈썹의 감촉이 어색했습니다. 왼쪽 뺨이 오른쪽 뺨보다 더 차가웠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평소에 내가 자주 하는 자세인 듯했습니다. 고개를 가운데로 맞추니 왼쪽 어깨가 살짝 올라가면서 힘이 들어갔습니다. 은근히 비틀어진 목을 느끼니 내 영혼이 만져졌습니다. 동그란 입 주변은 얼굴의 다른 부위보다 더 따뜻했고, 입술에 침을 묻히니 차가운 바람이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생경한 감각 사이로 수많은 생각들이 삽화처럼 떠올랐습니다. 남자를 유혹하는 일에서부터, 지리산 골짜기에 숨어 낙엽으로 몸을 덮은 채 겨울을 났던 무식하고 가난한 빨치산들에 이르기까지, 머리의 안의 일을 달빛에 녹이고, 바람에 날려버렸습니다.
이 걸음의 의미는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걸었고, 육체 일부는 차가웠고, 또 다른 곳은 따뜻했으며, 빛이 내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졌을 뿐입니다. 그때, 내 영혼이 기뻐하며 춤추었고, 또 일부는 이유도 모른 채 흐느꼈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사라지고 '지금-여기'를 사는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