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명단은 왜 숨겨졌을까?
앞선 글에서 우리는 연대가 민주주의의 기반이며 시작점이요, 민주주의 시민의 책무라고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책무라고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 누군가를 연대의 대상으로 설정할 것이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연대를 도덕원리라고도 했지만 도덕원리의 특징 중 하나는 자발성이니까요. 결국 연대의 실천에 있어서는 연대감의 형성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연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야 연대의 방법에 대한 고민도 시작되니까요. 그렇다면 연대감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요?
드라마 <경성크리처-시즌1>에서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10화에서 장태산(박서준 분)은 일본 경무국의 행사에 폭발물을 터뜨리는 데 성공합니다. 항일 비밀조직이었던 애국단의 단원들은 장태산을 '장 동지'라고 칭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죠. 하지만 장태산은 장 동지라는 호칭을 거부하며 자신은 전당포의 주인일 뿐이라고 합니다. 값 나가는 물건이 있으면 후하게 쳐 줄테니 언제든 가져오라고 하며 술집을 떠납니다. 장태산과 애국단의 목표는 같았을지 몰라도 그 동기나 목적이 달랐던 겁니다. 애국단의 목적은 대한의 독립이었으나 장태산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장태산은 왜 그 일에 뛰어든 것일까요?
이전에 다루었던 제8화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웅성병원으로 뛰어 들어간 이유에 대해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죄 없는 이들이 당하는 꼴을 보니 그냥 화가 났다고요. 장태상의 동기는 독립과 같이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으로 보니 화가 났던 것 뿐이었습니다.
철학자 강신주는 한 강연에서 나치의 실무자가 유태인을 가스실로 들여보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유태인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교도소에서 수형자를 이름이 아닌 수감번호로 주르는 것처럼 말이죠. 누군가를 그의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가 가진 고유성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의 대화는 고유성과 고유성이 만나는 순간이며, 이는 서로가 공유하는 기억을 창조해내는 과정입니다. 그 상황에서 상대방을 가스실로 들여보내는 선택은, 그것이 비록 조직의 명령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매우 어려운 일로 변합니다. 그리고 설사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나치의 실무자는 죄책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죽는 순간까지 떨쳐내지 못 할 죄책감 말입니다.
다시 <경성크리처-시즌1>으로 돌아와 생각해 봅시다. 만일 장태산이 생체실험 대상자들과 생체실험실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 이야기를 단지 소문으로만, 혹은 신뢰할만한 정보원으로부터만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옹성병원에 갇힌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만 치부했을 겁니다.
2022년 10월 29일에 일어난 이태원 참사를 생각해 봅시다.이태원 참사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159명이 사망한 압사 사고였습니다. 부상자 역시 200명에 가까웠습니다. 행정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음으로 벌어진 참사였지요. 국가적 참사였음에도 불가하고 정부는 희생자에 대한 신상 공개를 막아섰습니다. 아마 그 이유는 희생자들에 대한 시민 일반의 감정이입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희생자의 신상이 공개되면, 우리는 머리 속에서 그를 구체화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아무개(25세, 여성, 신입사원)라고 한다면 우리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25세 신입사원 여성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녀와 같은 이가 사망했다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200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길거리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만 봐도 눈물이 난다고 하던 시민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군지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숫자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이웃과 친구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연대감은 이렇게 동질성을 느낄 때 만들어집니다. 연대의 확장을 위해 시선을 우리 생활 속 빈 공간으로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한 생활 속에 갇힌다면 우리는 보던 것만을 보게 됩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동네 열쇠집을 평소에는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시선에만 머무른다면 우리는 바로 옆집의 불편을 모른 채 그냥 지나갈 확률이 높습니다. 이웃이 겪고 있는 자유와 평등의 박탈에 대해 무감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다음 연재부터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함께 품어보려 합니다.
이번 글로 <사색하는 민주주의 - 제1부>의 연재를 마칩니다. 제1부애서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롭게 연재될 제2부에서는 흔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을 민주주의의 눈으로 살펴보는 작업을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제2부의 연재 브런치북의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계속해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brunch.co.kr/@sgdoc/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