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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광 Nov 19. 2023

계급투표를 못 하는 이유

1인1표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로서의 정치체제를 이야기할 때 기본사항으로 회자되는 것이 1인 1표, 보통‧직접‧비밀‧무기명 선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어떤 사안이건 결국 가난한 자의 이익으로 결론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투표권자 모두가 당연히도 계급 투표를 하리라 여겼던 거죠. 하지만 2021년 기준 한국의 상위 1% 평균 소득은 4억 5,856억 원이었던 반면에 하위 80%의 평균 소득은 870만 원이었습니다(장혜영, 2023).  53배의 격차였습니다. 만일 실제로 모두가 계급 투표를 했다면 빈부 격차는 지금처럼 이렇게 벌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진보정당들이 원내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했을 것이며, 어떻게든 최저임금의 수준을 높였을 테니까요.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 선택이라는 계급투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막혀 있습니다. 그것은 지역일 수도, 국가관일 수도, 경제 상황일 수도, 당선가능성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고려 사항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고려 사항을 작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가장 쉬운 예로 일용직 노동자의 투표 시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는 투표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일터에 나가게 됩니다. 그가 투표를 하겠다는 건 하루 일당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퇴근 후 투표에 참여할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건 일터가 가까운 데로 잡힌 날에만 해당됩니다. 사전투표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전투표일에도 일을 나갑니다. 물론 법으로만 따지자면 투표시간이 보장됩니다. 이를 위반하는 고용주는 과태료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법이 일용직 노동자들한테 현실적으로 적용될 것이라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제주신문. 2017).


현대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본의 영향력이 더욱 직접적입니다. 2010년 미국 대법원은 슈퍼팩(SuperPAC: 특별 정치활동위원회)을 통해 선거자금을 무제한으로 모으는 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기업들이 정치광고에 무제한으로 돈을 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죠. 실제로 2015년 상반기 슈퍼팩 모금액 3억 1,368만 달러의 절반은 1인당 10만 달러 이상을 내놓은 300여 명의 돈으로 채워졌습니다. 이에 대해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대통령은 미국의 정치제도가 과두제로 변해버렸다고 비판합니다. 기업이 낼 수 있는 제한 없는 정치자금은 무제한의 기업 뇌물이라면서 말이죠(국민일보. 2015). 


영화 <zizek!> 이미지


민주주의가 자본으로부터 받는 위협은 더욱 넓고 은밀합니다. 박영선 전 의원에 따르면 하루는 삼성그룹 퇴직자라고 밝힌 한 남성이 찾아와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하드디스크를 조사하니 최신 휴대폰 시제품을 선물한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선물이 행해졌는지 확인된 바는 없지만, 그 명단에는 판검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팟캐스트에서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자그마한 선물 받을 것 때문에 수사나 판결할 때 영향을 받는다면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또 같은 인터뷰에서 퇴임 전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대화를 전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권력이 이제 재벌에게 넘어갔다며 한탄했다고 합니다(노컷뉴스, 2015). 


 <지젝(Zizek)!>을 만든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에스트라 테일러(Astra Taylor) 역시 노 전 대통령과 같은 진단을 합니다. 다만 그는 노 전 대통령과는 달리 희망적입니다. 아마 대통령이었던 현실 정치인과 감독이었던 창작자의 차이일 겁니다. 그는 아테네인이 생각하는 인민의 지배를 가난한 자들에 의한 지배로 단순화시킵니다. 아니, 단순화시켰다기보다는 민주주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라는 무시무시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말합니다. 형식적인 1인 1투표제만으로는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에스트라 테일러, 2020). 


1인 1표만으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자본은 전방위적으로 1인 1표라는 수단을 그대로 놓아둔 채 결과를 유리하게 바꿉니다. 1표를 행사하는 1인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죠. 철학자 이진우의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누가 착취자인지도 모른 채,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착취당하고 있다는 진단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빈부격차의 원인이라고 합니다(이진우, 2021). 


* 장혜영 의원 보도자료(2023.3.2.), <문재인 정부, 박근혜 정부에 비해 소득불평등 심화>. 

   제주신문(2017.5.4.자), <사전투표도 우리에겐 해당 안 돼>.

   국민일보(2015.8.3.자), <미(美) 대선, 슈퍼리치 300여 명이 쥐락펴락… 기부 상한 없는 슈퍼팩 논란>.

   노컷뉴스(2015.2.27.자), <박영선 "노무현,'권력이 재벌에 넘어갔다'며 좌절감">. 

   에스트라 테일러(이재경 역), 「민주주의는 없다」, 반니, 2020(전자책).

   이진우, 「불공정사회」, 휴머니스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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