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함정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주장은 20세기말에 새롭게 나온 과장된 견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칼 맑스는 자본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자본주의는 그 특성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경제모델이기 때문입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주인-노예의 이분법은 중세로 들어와 영주-농노로 바뀌었고, 자본주의는 이를 고용주-노동자라는 명칭으로만 바뀌었습니다. 지배하는 소수의 이름이 주인에서 영주로, 다시 고용주로만 바뀌었다는 것이 칼 맑스의 통찰이었으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자본론>을 쓰게 만든 계기였습니다. 그는 어떤 사회에서든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착취적인 생산관계를 철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리처드 울프, 2023).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반동으로 출현한 공산주의, 이를 실현한다고 자처하는 현실의 공산국가는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민주적일까요? 하지만 맑스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20세기 전반기 소련이 취했던 스탈린주의에서도 비판을 가합니다. 스탈린주의의 중심 사상은 ‘인민은 국가와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국가는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라는 것인데, 현실의 스탈린주의에서는 봉사하는 사람만 있을 뿐 봉사받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주의에서의 ‘봉사받는’ 인민은 ‘봉사하는’ 인민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폭압적인 허구, “모든 현존하는 개인이 그에 봉사해야만 하는 끝없이 끔찍한 희생을 요구하는 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겁니다(슬라보예 지젝, 2017).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제제의 함정을 인민이 주인이 아닌 신(神)이라는 데 있다고 정리합니다. 그가 말한 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종교적인 신, 모든 걸 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근대 이전에 인류가 섬겨왔던 허구적이지만 폭압적인 신입니다. 지배체제의 역사는 큰 틀에서 신(神)의 지배, 왕(王)의 지배, 민(民)의 지배 순으로 변해왔습니다. 지배자를 중심으로 살핀다면 비가시적 타자에서 가시적 타자로, 그리고 가시적 자아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가시적 자아, 즉 이 민(民)의 지배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이 ‘민(民)’의 실체가 증발되어 버릴 위기에 놓여버렸습니다. 증발이 완성된다면 ‘민(民)’은 비가시적 타자의 새로운 이름으로 탄생할 것입니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민(民)이 실제로 주권자로서 존재할 것, 어쩌면 이것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민(民)이 실제로 주권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모호하긴 합니다.
하지만 모호하다고 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민주주의의 논의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에 대한 힌트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짧은 연설문에 따르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인민을 위한 것, 인민에 의할 것, 인민의 통치일 것. 이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누락된다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말한 철인왕(哲人王)이 실제로 국가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체제가 인민들의 삶에 가장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건 민주주의라 할 수 없습니다. 인민에 ‘의한’ 통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이승원. 2017). 위에서 본 지젝의 스탈린주의 비판 역시 인민을 ‘위한’ 지배가 제거되었다고 말입니다.
※ 참고문헌
리처드 울프 (2023). 맑스주의 이해하기(손호중 옮김). 이학사.
슬라보예 지젝 (2017),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난장.
이승원 (2017). 민주주의.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