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맡겨둔 것 좀 찾아갈게요

by 스구

하지 : 양력 6월 21일경. 북반구에서는 이 시기에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








나는 상업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다. 다루는 감정의 결이 섬세하거나 잔잔한 스토리의 영화를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부러 상업 영화를 찾아볼 때가 있다. 어떤 명확한 감정이 필요할 때.






통쾌함이 필요할 때는 권선징악이 확실한 액션 영화를, 깔깔 웃고 싶을 때는 말맛이 좋은 코미디 영화를 일부러 찾아본다. 나는 이걸 ‘맡겨둔 것을 찾으러 간다.’고 말한다. 사실 맡긴 것도 없고, 맡아둔 것도 없지만 ‘코미디 영화’를 보면 나는 분명히 ‘웃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일 년 중 한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 무렵, 나는 ‘맡겨둔 행복’을 찾기 위해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나와 Y 그리고 J는 서로의 친구 경력이 15년 정도 되는 베테랑이다. 호흡만으로도 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았다. 이건 정말 초월적인 능력이다. ‘아’하면 ‘어’하는 호흡 그 이상이었다. 그러니 만나기만 하면 ‘배꼽 잡게 웃을 일’이 무조건 한 번은 있었다. 평소에는 웃고 싶지 않아도 애써 웃어야 하는 일들 뿐이니 우리는 주기적으로 만나 진짜 웃음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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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이후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해외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Y가 잠깐 한국에 온다는 소식에 서둘러 여행을 계획했다. 숙소만 일찍 예약하고 다른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여행지는 공주였다. 첫날엔 폭우가 쏟아졌다. 조심조심 비를 뚫고 도로를 달려 무사히 도착했다.




숙소로 가기 전 읍내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우리의 유일한 계획은 저녁을 만들어 먹는 것이었다. 메뉴는 닭발과 부추전.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반죽이 한 국자 크게 올라갔다. 지글지글. 빗소리와 전을 부치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부추전과 튀김가루, 청양고추가 전부인 단출한 부침개였다. 처음엔 못생기게 부쳐졌지만 한 장 한 장 더 할수록 조금씩 실력이 늘었다. 가장 예쁘게 부쳐진 것은 따로 담아 주인 할머니께 드렸다. 식탁에 부추전과 포장해 온 닭발, 막걸리가 놓였다.






막걸리와 함께 본격적으로 웃음 사냥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은 지금까지 족히 열 번은 넘게 했을 이야기였다. 심지어 했던 얘기를 또 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평소에는 잊고 살기 쉬운 이야기. 우리가 만나야만 다시 상기되는 기억이다.




너무 잘 알고 있어 운만 띄워도 뒤에 무슨 얘기를 할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타임머신이다. 우리는 그 타임머신을 타고 손쉽게 열다섯의 우리로 돌아간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 하며 입담이 점점 늘었다는 것이다. 횟수가 한 번씩 늘어갈 때마다 이야기에는 감칠맛이 더해진다.









나는 쉽게 생각 속에 침잠하는 사람이라 평소에도 스스로를 잘 살피고 관리해야 한다. 좀 피곤한 기질을 타고났다. 그런 내가 내 친구들을 만날 때는 늘 한여름의 낮이 된다. 나다운 모습으로 쨍하게 빛난다. 함께 있으면 재미있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재미있고, 위로하지 않아도 위로가 된다.





이 여행이 끝나면 다시 평소의 나로 돌아가겠지. 하지가 지나고 나면 낮도 점점 짧아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맡겨둔 행복이 있으니까. 그게 언제든 찾으러 간다면 난 기어코 한낮이 될 것이다.


나는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우리끼리라면 늘 열다섯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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