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

습도가 높은 날엔 커피식 준비운동을

by 스구

망종 : 양력 6월 6일경. 수염이 있는 곡식(벼, 보리 등)의 씨를 뿌리기에 적당한 때.






내가 그리는 여름은 뜨거운 태양에 파란 하늘, 시끄러운 매미소리로 가득하다. 하지만 사실 여름의 시작은 그렇지 않다. 하루는 빨래를 널어도 금세 바삭바삭 마르지만 또 다른 날은 꼬박 하루가 지나도 묘하게 축축하다. 곧 장마가 올 것이다. 덥고 습한 장마 기간.






그런 날에는 일부러 커피를 내린다. 습도가 높으면 커피 향이 더 잘 느껴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요즘 같은 날이 제격이다. 이왕이면 직접 원두를 갈아서 마시는 편이 좋겠지만 그라인더가 없어 분쇄된 원두를 사거나 드립백을 이용한다. 우선 물부터 끓인다. 그런 다음 뜨거운 물로 필터를 적시고 잔을 데운다. 나는 본격적으로 커피를 내리기 전, 이 준비 시간을 좋아한다.






스무 살, 첫 아르바이트를 했던 카페에서였다. 바쁜 매장에 일머리도 경력도 없이 급히 투입된 나는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뒤돌아 설거지를 하던 손가락에 쥐까지 났다. 그때 크고 작은 것들을 많이 배웠지만 가장 좋아했던 건 잔을 데우는 일이었다. 실수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일하는 내내 긴장 상태였는데도 잔을 데울 때만큼은 괜히 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주문을 확인한 후 미리 잔을 데워놓고 있으면 이 커피를 마실 손님에게도, 커피를 내리고 있는 동료에게도 다정함을 전하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 커피를 내리고 있는 지금은 오롯이 나에게 다정한 시간이다.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면 꼭 ‘자 이제 커피가 입장합니다~’하고 커피잔과 나에게 알려주는 것 같다. 이제 조금씩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린다. 일부러 똑똑 떨어지는 커피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한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것이 어느덧 한 잔을 가득 채운다. 그 과정을 하나하나 맛보며 내려진 커피는 조금 더 특별해진다. 축축한 날씨덕에 훨씬 향기롭다.





습하기만 한 날도 좋은 점은 있구나!

(아직도 눅눅한 빨래는 못 본 척해야 하지만...)

뜨겁고 바삭한 여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늘도 커피를 내린다. 날씨가 기분을 지배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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