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생각을 담았으며, 관련 영화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아마 현시대의 가장 논란이 되는 감독 중 한명이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는 데뷔작부터 가장 최근작인 <살인마 잭의 집>까지 세상에 내놓은 작품마다 무수한 논쟁을 낳으며 평단의 지지와 멸시를 동시에 받아왔다. 또한 영화 외적으로도 논란을 일으키며 급기야 2011년에는 칸 영화제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 (외교상 기피 인물)로 지정되기까지에 이른다. 이토록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있는 라스 폰 트리에는 과연 어떤 영화를 만들어 왔을까.
1984년 라스 폰 트리에는 <범죄의 요소>로 화려하게 영화계에 등장한다. 기이하고 강렬한 에너지를 지닌 이 작품은 시종일관 관객을 압도하는 옐로 톤의 화면으로 압도적이다. 이는 아직 원숙하지는 않지만 그만의 음울하고 염세적인 세계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그 후 트리에는 <유로파>에서 더욱 실험적인 연출로 돌아오며 자신의 테크니션적인 면모를 마음껏 뽐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1995년 다소 교조적이며 구속적이기도 한 도그마 95를 선언함으로 그의 영화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도그마 95 십계명
[1] 촬영은 반드시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소품들과 세트를 끌어들여선 안 된다. 만약 이야기 전개상 특정한 소품이 필요하다면 로케이션은 그 소품이 있는 곳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2] 사운드는 절대로 이미지와 분리하여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혹은 그 역도 안 된다. 음악은 그 신(scene)이 촬영되고 있는 곳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 이상은 사용돼서는 안 된다.
[3] 카메라는 반드시 핸드헬드여야 한다. 손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움직임이나 정지 상태는 허용된다. 카메라가 서 있는 곳에서 촬영돼서는 안 된다.
[4] 필름은 반드시 컬러여야 한다. 일체 특수 조명의 사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노출을 맞추기에 빛이 충분치 않다면 그 신(scene)은 잘려 나가거나, 카메라에 램프 하나만 부착하여 사용할 수 있다.
[5] 옵티컬 워크(필름에 인위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광학 처리)와 필터 사용을 금한다.
[6] 영화는 피상적인 액션을 담아서는 안 된다. 살인, 폭력 등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7]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것은 금지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현재,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8] 장르 영화는 허용되지 않는다.
[9] 영화의 형식은 반드시 아카데미 35mm여야 한다.
[10] 감독 이름은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는다.
1996년 발표한 <브레이킹 더 웨이브>로 트리에는 도그마 95의 규범을 모두 지키지는 못했지만 종래의 기교적인 모습을 버리고 새롭게 돌아온다. 이때부터 그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여성 수난사의 원류가 아마 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극 중 인물들의 극단으로 치닫는 고통은 사뭇 성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적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그의 능력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영화가 호불호가 확연히 구분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 후 나온 <백치들>은 도그마 95 선언에 입각하여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고 내용적으로도 관객들에게 충격을 선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차기작으로 <어둠 속의 댄서>를 내놓으며 인위적인 촬영을 배격하던 도그마 95 선언을 스스로 어기기 시작한다. 이후 <도그빌>에서는 아예 연극 무대와 같이 바닥에 선을 그어 놓고는 “이곳은 로키 산맥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 도그빌이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도그빌>을 얘기하기에 앞서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의 언급을 빼놓을 수는 없겠다. 큐브릭의 완벽주의가 묻어난 이 영화는 인위적인 조명을 배제한 채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함으로 아름다운 화면을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이와 더불어 헨델의 사라방드와 슈베르트, 비발디의 음악 등은 이 회화적인 영화에 정서의 깊이를 더한다. 마이클 호던의 내레이션 사용과 1, 2부로 나뉜 형식을 취한 이 작품은 분명 도그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그빌>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존 허트의 내레이션을 사용하고 영화를 프롤로그와 9개의 장으로 나눈다. 마치 <배리 린든>과 유사한 형식하에 영화를 위치시킨 후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선언같이 말이다. 영국 악센트의 내레이션과 비발디의 음악으로 시작된 영화가 부감 숏으로 연극 무대와도 같이 인위적으로 구성된 마을을 비춘다는 것은 <도그빌>이 <배리 린든>과 같은 곳에서 시작되었을지는 몰라도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파격적인 시도 하에 트리에는 전작들에서 온갖 수난을 겪으며 결국 죽음으로 성녀화되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대신에 단죄하는 여주인공을 내세운다.
한없이 자비로운 주인공 그레이스는 도그빌 주민들에 의해 행해지는 온갖 고통을 용서함으로 그들을 교화하려 한다. 이러한 용서가 사실은 내가 남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위치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 즉 누군가를 심판하는 것 못지않게 용서하는 것 역시 오만할 수 있다는 트리에의 시선은 참으로 흥미롭다.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벽을 두고 마을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은 마을의 추악한 실상을 알지만 모른 채 하는 주민들과 겹치며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결국 마치 예수처럼 계속해서 죄인을 용서하려 하는 그레이스는 아버지와의 대화 끝에 개 같은 마을 도그빌을 불 지르고 주민들을 죽여버린다.
이 장면은 예수가 재림해도 알아보지 못 할 현대인들을 향한 조소가 아닐까. 사실 구원받지 못하는 현대인을 주제로 한 작품은 <도그빌>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종종 나올 정도로 그리 드물지는 않다. 최근 개봉한 영화로 예를 들자면 알리체 로르워커의 <행복한 라짜로>에서 성인의 부활을 목도함으로도 구원받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들 수 있겠다. 어찌 보면 그다지 새롭지 않은 주제일 수 있지만 트리에 특유의 염세적인 시선은 <도그빌>에 잘 녹아 강렬한 인상을 준다. 전작들의 주인공과는 다른 오만한 그레이스를 도그마 95선언을 역행하면서까지 등장시킨 것은 어쩌면 감독 자신이 오만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영화의 순수성을 회복한다는 미명 하에 내세운 원칙은 애초부터 지켜지기 힘들었고 교조적이었다. (트리에 자신마저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이라는 기술적 진보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헌장의 의의를 의심하게 했다) 이러한 도그마 선언이 혹자의 평가처럼 효과적인 마케팅이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영화 정신을 선언하고 이를 깨부수는 일련의 과정을 보아 라스 폰 트리에가 누구보다도 영화에 대해 깊게 성찰하는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트리에는 <도그빌> 이후 <만덜레이>에서 다시 비슷한 형식을 차용해 미국의 노예제도를 조명한다. 그 후 그는 갖가지 성경적 메타포로 가득찬 <안티크라이스트>를 내놓고 우울이라는 소재를 성공적으로 표현한 <멜랑콜리아>까지 발표하며 미학적으로 한층 더 성장함을 인정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표현 수위와 음울한 분위기는 그의 상태가 괜찮은지 염려될 정도이다. 결국 그는 칸 영화제 <멜랑콜리아> 시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나치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 후의 차기작인 <님포매니악>은 전작들과는 다른 얄팍한 깊이를 과감한 표현수위로 덮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와중 그에게 이렇게 묻고 싶어졌다. 라스 폰 트리에, 당신 괜찮아요? 이 물음에 대해 그는 보다 자조적인 영화 <살인마 잭의 집>으로 자신이 건재함으로 답했다.
<살인마 잭의 집>의 주인공 잭은 궤변론자로 보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버지(베르길리우스)’에게 첫 번째 살인을 고백하며 난데없이 ‘자재 고유 의지론’을 들먹인다. 건축 자재가 지닌 고유한 의지를 그대로 따른 건축물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라며 항변하는 그는 자신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히치하이커와 때마침 지근거리 내에 위치한 공구 잭의 존재로 마치 살인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살인을 예술로까지 연결시킨다.
이토록 자신의 이름과 동일한 공구 잭을 살인 도구로 부여받음으로 그는 자신의 소명이 살인으로 예술을 완성시키는 것인 양 연쇄살인마가 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형편없는 그의 두 번째 살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살인 솜씨가 마치 횡설수설하며 궤변을 늘어놓는 그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잭의 자기 정당화는 계속 이어지며 관객들은 점차 묘하게 예술의 범위와 도덕성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과연 그동안 아름다움과 예술을 동일시한 것은 아닌가? 라스 폰 트리에는 잭의 입을 빌려 도덕적 잣대로 예술성을 죽이는 것에 반대한다고 외친다. 즉 예술에는 선과 악이 없으며 표현의 자유 억압을 반대한다는 그의 생각을 궤변론자 잭의 입을 빌려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트리에는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스스로 영화상에 끌어올려 금기를 위반하며 무수한 논쟁을 낳은 본인과 본인의 논란까지 짚어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잭이 지옥을 벗어나려다 오히려 지옥의 최하층에 떨어지면서 화면은 네거티브 필름으로 전환된다. 이때 레이 찰스의 ‘Hit the road Jack’이 경쾌하게 울리자 라스 폰 트리에의 재치에 실소가 터져 나오며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라스 폰 트리에, 당신 하고 싶은 대로 영화 만드세요!
69기 최동원
- 이 글은 Google Play 스토어에서 무료로 열람하실 수 있는 도서 <Feelm: 1권>(서강영화공동체, 2020)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