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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M Aug 14. 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상호를 지지하며

영화와 연상호 감독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생각을 담았으며영화 <부산행>, <염력>, <서울역>, <반도>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있습니다


연상호 감독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지만, <부산행>은 영화 홍보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좀비’라는 단어를 스스로 언급한 적이 없다. 영화의 메인 카피는 ‘전대미문 재난 블록버스터’이며, 그 재난의 원인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라고 칭하고 있다. 당연히 순제작비 100억대의 텐트폴 영화가 좀비를 전면에 내세웠을 시에 따르는 마케팅적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살아있다>, <킹덤>과 같은 소위 ‘K-좀비’ 작품의 성공 사례가 충분한 요즘이면 모를까, 당시만 해도 좀비는 호러 영화의 하위 장르 중에서도 가장 마이너한 장르 중 하나로 여겨지곤 했기 때문이다. <엑소시스트>, <컨저링> 같은 영화의 성공으로 어느 정도 대중적 인지도와 선호도가 있었던 오컬트 장르의 <검은 사제들>조차 ‘오컬트’라는 단어를 완전히 배제하고 마케팅에 임했는데, <부산행>이 그 암묵적인 금기에 호기롭게 도전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예상된다. 반대로 재난을 다루는 영화라면 우리나라 관객들은 <2012>같은 초대형 블록버스터나 <인투 더 스톰>같은 저예산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가리지 않고 아낌 없이 흥미를 보내주기 때문에, ‘좀비’를 배제하고 ‘재난’을 앞세운 <부산행>의 마케팅 방식은 일견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행> 포스터와 스틸컷

  그러나 마케팅적인 측면을 차치하고서라도 <부산행>은 ‘좀비 영화’로 불리기에 다소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분명 이 영화의 시작점은 좀비가 맞다. 영화 속에서 감염자들을 직접적으로 ‘좀비’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지만, 감염자들의 모습과 행동 등이 그간 타 작품에서 봐왔던 좀비의 특징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부산행>의 감독인 연상호는 좀비에게 그 이상의 관심을 두거나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 기원과 특성도 불분명하며, 심지어는 관객들이 좀비라고 부르는 그 대상이 살아있는 감염체인지, 아니면 ‘살아 움직이는 시체(living-dead)’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저 이들은 갑자기 우리의 삶에 들이닥쳐 일상생활을 파괴하는,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이처럼 <부산행>의 좀비는 호러 영화 속 개성 있는 크리쳐라기 보다 인간이 감히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더 가깝다. 자연재해와 유사한 괴물을 찾다 보니 몰개성적인 특성의 좀비가 선택된 것이지, 좀비라는 소재에 흥미가 있어 좀비를 택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증명하듯 영화가 진행될수록 열차 내부의 사람들에게 더 위협이 되는 존재는 좀비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부산으로 향하고 있는 생존자들이다. 그들은 타인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생존과 성공 만을 위해 행동한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인 펀드 매니저 석우조차도 이와 같은 캐릭터 디자인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연상호의 좀비 사용법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소재 사용 방식과 묘하게 닮아 있다. 타란티노에게 소재는 깊이 탐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소재란 자신의 오락성을 마음껏 펼치기 위한 장일 뿐이다. 윤리를 위배하지 않고 폭력을 가하기 위해 나치(<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와 노예제(<장고:분노의 추적자>를 이야기에 끌고 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연상호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좀비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디스토피아를 구축하는 데에 필요한 재료이자 주인공들을 가로막는 장애물, 그리고 자신이 꿈꿔온 여러 액션 시퀀스를 현실화하는 데에 필요한 수단에 불과하다. 볼만한 오락 영화를 기대하고 <부산행>을 관람하러 간 관객들은 대부분 만족했으나, 화끈한 좀비물을 기대한 관객들은 십중팔구 실망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염력> 포스터와 스틸컷

  이 괴리가 폭발했던 작품이 바로 <염력>이다. 언뜻 보기에 <염력>은 우연히 초능력을 얻은 가장의 좌충우돌 코미디를 표방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연상호가 만든 영화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 중 하나인 용산 참사를 재구성한 부조리극이다. 지독한 현실 속에서는 이 사건을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어서 초능력이라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어떤 요소나 장치를 필연성 없이 등장시켜 극의 복잡한 갈등을 해결하는 수법)를 가져와 휘두른 것이다. 이 인식에 걸맞게 영화도 ‘있음직’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허무맹랑하게 풀어낸다. 덕분에 <염력>은 연상호 영화 중 가장 밝고 일명 ‘쌈마이’스럽다. 그러나 이 ‘쌈마이’스러움의 뿌리는 결국 짙은 패배주의와 무력감이기에 <염력>은 도저히 현실에 가닿을 수 없어 끝내 너무나도 허망하고 시리다. 안타깝게도 100억대의 제작비로 ‘가장 연상호적인 상업 영화’를 만들었던 연상호의 시도는 대실패로 돌아간다. <염력>의 스타일과 톤은 관객들이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에서 기대했던 것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반도>는 표면상으로는 <부산행>의 속편이나, 내적으로는 이 실패에서 피어난 영화이다. 연상호는 “<염력>은 개인의 취향과 가상의 관객 중 전자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며, “<염력>의 실패를 통해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무엇일까 고민했다”고 밝힌다. 그 고민에 스스로 내린 답은 더 이상 극장은 영화를 숨 죽여 감상하고 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럿이서 함께 영화를 보며 신나게 즐기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반도>는 관객들이 ‘대형 블록버스터’하면 으레 기대하는 요소들의 총집합과도 같은 영화이다. 우선 기획의 순서부터 남다르다. 연상호에 따르면 <반도>의 시작점은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소녀의 이미지이다. (아버지성에 집착하곤 했던 그간의 연상호 세계들을 떠올려보면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 이미지는 장장 20분여에 달하는 카체이싱 시퀀스의 구성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굵직굵직한 장면들이 그려진 다음 비로소 캐릭터의 감정선과 이야기 같은 드라마적 요소가 채워졌다. 혹자는 “연상호의 영화를 기대했는데 실제로 본 건 ‘K-매드맥스’였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 반응이야말로 연상호가 정확히 의도했던 것인 셈이다. 


  물론 좀비라는 소재를 재료로만 사용한다는 그 기조만큼은 여전하다. 하지만 부산행 열차와 그 경로 이외의 풍경에는 전혀 눈 돌리지 않던 <부산행>이나 투박함으로만 밀어붙이던 <염력>과는 다르게, <반도>에서의 연상호는 자신이 구축한 세계관을 시각화하는 데에도 상당히 공을 들인다. <부산행>에서 처음 등장했던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한반도를 휩쓴 뒤 4년이 지난 <반도>의 한반도는 폐허 그 자체이면서도 동시에 한국적인 면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대형 유리 건물 속에는 좀비들이 가득하며, 나이트클럽을 광고하던 트럭은 좀비들을 유인하는 데에 쓰인다. 대형 복합 쇼핑몰은 생존 군대의 주둔지로 탈바꿈했는데, 그들은 생존자와 좀비를 한 데 가둬 서로 싸우게 하는 쇼를 진행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쇼핑몰은 ‘대중들을 즐겁게 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인천항과 오목교와 같이 실제 지명이 그대로 등장하는 곳들은 친숙함과 생경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는 시각적인 측면을 강화해야 관객이 영화를 보다 더 잘 즐길 수 있다는 결론에서 나온 선택이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 선택은 <부산행>과 <염력>에서 지적받았던 여러 문제점을 연쇄적으로 해소하는 결과를 동반한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액션이다. <반도>의 액션은 핸드헬드와 빠른 컷 편집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흐름을 거스른다. 대신 연상호는 배경과 합이 상당히 잘 보이게 액션을 찍어 놓았다. CG와 미술에 대한 자신감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선택이다. 그만큼 결과물도 놀랍다. 초토화된 수도권을 누비며 쫓고 쫓기는 <반도>의 카체이싱 시퀀스는 그 동안 한국 영화에서는 보지 못했던, 생경한 광경과 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또 감독이 부여한 역할 대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다소 강했던 전작들의 악역과는 달리, <반도>의 서 대위와 황 중사는 덜 자극적으로 행동함에도 훨씬 그럴듯하고도 강력한 악역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영화가 서 대위와 황 중사에게 큰 사연이나 서사를 부여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이 사는 세계를 그럴듯하게 제시한 행위만으로도 캐릭터에 설득력이 더해졌을 뿐이다. 



  악역이 제대로 자리 잡히니 이야기의 결론도 훨씬 자연스레 도출된다. 사실 연상호의 독립 애니메이션과 상업 영화 간의 가장 큰 차이는 결말이다. 이 차이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서울역>과 <부산행>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울역>에서는 가출 소녀 혜선이 아빠라고 부르며 따르던 석규가 사실은 포주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석규가 혜선을 강간하려 하자 혜선이 좀비로 변해 석규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염세주의를 마음껏 펼치는 애니메이션에서는 결말도 말 그대로 ‘염세의 끝’을 보여준다. 그의 염세는 캐릭터를 가리지 않는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같은 편에 서 있는 캐릭터나, 주인공의 반대 편에 서 있는 캐릭터나 모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결말을 향해 맹렬히 돌진한다. 반면 <부산행>에서는 모두가 몰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석우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그의 딸 수안과 만삭의 임산부 성경이 가까스로 생존하고, 끝내는 부산에 도착하여 무사히 구출된다. 이 태도는 어쩌면 봉준호가 <설국열차>에서 보여준 모습과 유사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히 선을 믿고 희망을 좇는 이들, 혹은 아이와 같이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심을 수 있는 이들을 위한 자리만큼은 자그맣게 마련해놓는 것이다.


  

 문제는 그 자리를 어떤 방식으로 내어줄 것인가에 있다. 그가 창조한 염세적인 이야기는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전환점을 만들어 결말을 설득해내야만 하는데, 안타깝게도 연상호는 그 지점에서 계속 미끄러지곤 했다. 석우의 내적 성장과 부성애를 수단으로 사용했던 <부산행>은 지나치게 이질적인 톤 앤 매너로 인해 ‘분유 신파’라는 조롱을 받았고, 아예 개연성에서 탈피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현실을 풍자하고자 했던 <염력>은 그 의도를 설득하지 못한 채 ‘허무맹랑한 판타지’라는 결과만 남겼다. 그런데도 연상호는 <반도>에서 신파를 다시금 끌고 온다. 물론 이 신파는 <반도>가 비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시종일관 속도감 있게 진행되던 영화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고, 애절한 음악과 슬로우 모션은 남용되며, 배우들은 계속해서 울고 있다. 


 

 여기까지 보자면 연상호가 여전히 신파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연출적인 면을 잠시 놓고 보자면, <반도>의 신파는 내적 타당도가 굳건하다는 점에서 앞선 두 작품과 결을 달리한다. <반도>의 핵심은 인간다움이다. 영화의 선과 악도 그에 따라 구분된다. 그러나 이들을 손쉽게 절대 선 혹은 절대 악이라고 칭할 수 없다. 단지 한 쪽은 절망 속에서 자신의 생존만을 좇다가 인간다움을 잊어버렸을 뿐이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았을 뿐이다. 영화는 같은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두 집단, 민정의 가족과 631부대의 모습을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하여 그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설정이 이해될 수 있게끔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정석을 배치한다. 정석은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나와 내 집단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존자를 구출하는 걸 포기했던 인물이다. <반도>는 이런 정석이 의도치 않게 두 집단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고찰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 과정의 끝에는 프롤로그에서 마주했던 딜레마와 유사한 상황이 놓인다. 민정이 자신을 희생해 그의 딸들과 정석을 살리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좀비들이 민정을 둘러싸고 있다. <부산행>에서 석우가 처했던 상황이 거의 그대로 민정에게 투여된 것이다. 그에 걸맞게 영화도 신파의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집단이 생존한다’라는 재난 영화의 오랜 클리셰 앞에서 정석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는 민정을 구하기 위해 나서고, 결국 민정과 함께 반도를 탈출한다. 이 모습은 이기심에 점령된 인간다움을 끝내 되살리지 못한 서 대위의 행보와 비교되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그 이면에는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 희생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대신 인물을 불필요하게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즉 영화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합일하려고 애쓰는 영화의 태도가 있다. 이것은 석우를 좀비에게 물리게 만들었던 <부산행>의 선택에서 분명 진일보한 결과이다. 이처럼 <반도>는 연상호가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단점도 보완하여 더욱 대중 친화적인 대중 영화를 만들고자 한 노력이 고스란히 배어나는 영화이다. 수많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상호를 지지하며 그의 차기작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68기 한규필


- 이 글은 Google Play 스토어에서 무료로 열람하실 수 있는 도서 <Feelm: 2권>(서강영화공동체, 2021)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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