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프롤로그
진실되고 떳떳하다면 말이 필요 없거나 줄거나 반면, 변명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말이 많아지거나 제스처가 분주해진다.
어떤 일에 대해 판단이 어렵다면 그 사람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태도를 종합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주변의 평판도 좀 들어 보고... 이렇게 해도 모호할 때가 있긴 한데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거나 아니면 본인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것도 아니라면 상대방을 허물을 무조건 덮어 주고 싶거나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 일 수 있다.
올여름은 그 어느 해 보다 더웠다.
날씨가 더운 건지 인생이 순조롭지 않으니 날씨마저 덮게 느껴지는 건지 그 둘 다 인지... 경계 주변은 항상 모호하고 알쏭달쏭하다.
경계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선을 분명하게 긋고 싶지 않은 것일 지도 모른다. 선을 그었다기 낭패를 본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선을 넘거나 뭉개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 십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단 말 자체에도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지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내지는 '진실은 언젠간 반드시 드러난다'는 말은 정말이지 진리에 가깝다 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그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얼마나 흥분되고 짜릿한지는 겪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강원도로 가야겠다고 그곳에서 인생 2막을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기까지 많은 시간과 예행연습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다행히도 실패는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순조로워 신을 섬기는 나로서는 그분의 도움이라고 밖에 믿을 수 없었다.
강원도로 가기 전에 강화도에서 8년을 살았다. (계획이 아니었는데 강화도에서 살았던 경험이 저절로 예행연습이 되었다.) 처음부터 강원도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었으나 그때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도시 근교의 강화도를 택했는데 모든 여건이 착착 맞아떨어지며 한 달 만에 강화도로 집을 옮겼다. 이사를 하고 햇볕 좋은 날 마루를 닦다가 깜짝 놀랐다. 여기가 도시의 아파트가 아니고 시골의 전원주택이라는 사실에...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았다.
그때도 신을 떠올렸다. 신이 도왔다고 내 힘으로는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할 수 없다며...
나는 잘 되는 일은 신에게로 안 되는 일은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 익숙해 있다.
할아버지의 포도밭에서 태어나 5~6세 때까지 살았던 후로는 줄곧 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시골 생활 경험은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40대 후반에 시골로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었고 주위 사람들이 어찌나 놀라던지 그들의 우려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때 지인들끼리 내기를 했다는 것이다. 내가 시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 나 올 시기가 6개월이다 1년이다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우려와 내기가 무색하게도 거기서 8년을 살았다. 8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은데 말이다. 그것도 경험도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에서 말이지...
그만큼 재밌거나 매력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실지로 거기서 살 때를 전 후로 비교해 보면 도시에서 살 때 보다 훨씬 행복했다. 인생의 황금기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우선 햇빛이 너무 좋았다 그다음엔 신선하고 맑은 공기 그다음엔 여유와 평화로움 마지막이 자연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마지막은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이웃이 놓고 간 가지며 호박을 들었을 때의 살짝 뭉클한 느낌...
내가 살던 전원주택 옆에 100평 남짓한 이웃집 텃밭이 있었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밤낮으로 풀 한 포기 없이 어찌나 정갈하게 가꾸던지 경탄스러웠다. 그곳에 마늘 양파 고추를 주로 경작하고 그 외 갖가지 야채를 조금씩 골고루 심어 먹었다. 내 신조 가운데 하나가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인데 그때는 그렇게 탐날 수가 없었다. 먹거리가 아니라 잡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잘 가꾸어진 텃밭 자체가 넘 탐이 났다. 가로 세로줄과 간격에 맞춰 그렇게 정확하게 식물이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래서 자연이 무질서하고 방만하다는 편견이 깨졌다.
그 텃밭 주인인 며느리는 60대 초반이었는데 낮에는 텃밭이나 꽃밭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집 가까이에 있는 인삼차 가루를 티백에 담아 포장하는 공장에 다니고( 나중엔 이 공장을 함께 다니게 된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서울이나 일산으로 쇼핑을 가거나 영화, 뮤지컬을 보러 갔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가족이나 친구와 해외여행을 다녔다.
그녀를 알고 그녀의 생활을 알게 되면서 난 저으기 놀랐다. 시골생활이 이렇게 여유롭고 풍요롭단 말인가 하며. 강화도에서 살면서 시골 생활에 대한 무지한 편견은 하나하나 깨져 나갔고 막연한 두려움도 빠르게 물러갔다. 시간이 갈수록 잘 왔다는 생각을 했고 만족스러운 만큼 적응도 잘해 나갔다.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 귀촌이나 귀농을 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제일 큰 어려움을 지역 '텃세'라고 한다. 농사나 밭일이 고되어도 이웃과 잘 지내면 품앗이를 하면서 재미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센 이웃 특히 텃세 부리는 이웃과 가까이 살면 정말 이지 일상이 쉽지 않다.
모든 면에서 경계가 모호한 시골에서 경계를 세우려 하는 순간 환상이 무참히 깨져 버린다. 부동산을 구입할 당시엔 아무도 이곳의 커뮤니티에 대해 귀띔해 주지 않는다. 겉으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부동산만 보고 구입하고 뒤늦게 당하고 나면 후회도 복구도 어렵다. 이웃의 텃세가 너무 힘들어서 매일 울다가 겨우겨우 집을 팔고 나갔다는 소문도 여러 번 들었다. 이웃과 관계를 단절하고 드문 불출 산다는 사람도 여럿 있었고...
시골생활에서 제일 힘든 건 텃세와 노동이다.
노동은 자기가 조절을 할 수 있다. 밭의 크기로 조절하면 되니까 그러나 텃세는 자기 뜻대로 조절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이웃이 걸면 휘둘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사이가 나빠지면 원수도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싶은 정도로 미워한다. 그런데 텃세를 안 당하는 정말 간단한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알았던 건 아니었는데 강화도 안에서 세 곳을 옮겨 다녔어도 텃세를 안 당했으므로 이 방법 때문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것은 '인사'였다. 동네에서 누구를 만나든 먼저 인사를 했다. 환하게 웃으며. 웃는 얼굴에 침을 어찌한다며 그래서 그런지 몇 번 인사를 하고 나면 도시사람들 보다 더 쉽게 빨리 다가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아무리 인사를 해도 형식과 예의에 그친다. 나중에 강원도에서 살 때도 텃세를 전혀 겪지 않았다. 텃세가 없는 시골 생활은 평화와 자유로음 그 자체다. 어떤 어려움도 이웃 주민들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다. 거기에 자연까지 더해지면 천국이 따로 없다.
강화도에서 살고부터는 모든 것을 다 바꾸어야 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생각도 생활도 사람도 그곳에 맞춰야 하루라도 편하게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선 그곳 생활 자체가 도시에서의 습관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바꾸지 않으면 적응할 수 없도록...
처음엔 신선하다. 새 인생을 사는 거 같아서 그런데 계속 이 기분을 가져가려면 도시에서 살던 습관을 버려야 한다.
우선 부지런해야 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면 망한다. tv나 인터넷 또 핸드폰과 친하면 안 된다. 하루가 정신없이 돌아가므로 한가하게 그런 것들을 들여다볼 시간도 여유도 없다.
시골에 살면서 처음에 이상했던 점은 마을에서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안보였다. 다 어디 갔나
집에 틀어박혀 있나 그러면 농사는 언제 짓는 거야 그런데 꽃밭엔 아름다운 꽃이 계절 따라 피고 논과 밭엔 언제 심었는지도 모르게 작물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농사는 새벽 일찍부터 나와서 짓고 낮에 집에서 쉬고 저녁 무렵 잠깐 둘러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사람 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시골에서 잘 살려면 농작물과 자연의 주기에 나를 맞추는 게 중요한데 이걸 못 따라가면 일 년 농사를 망친다고 보면 된다.
처음 1년 간 그 집(이제부터는 하얀 집이라고 부르겠다. 주택 외장이 하얀색 플라스틱 패널 외장재였다.)에서 살 때는 텃밭이나 꽃밭을 가꾸지 않았다. 집주인이 심어 놓을 것들을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정리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남아돌았다. 이웃과도 사귀지 않았고 도시의 친구들과는 점점 연락이 끊어지고 그러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대부분 책을 읽었다.
유일한 즐거움은 일주일에 한 번 도시에 있는 교회를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8년을 지내는 동안 거의 빠지지 않고 주일마다 교회에 참석했다. 나중에 친하게 지내게 된 이웃이 있었는데 그 언니가 나와 같이 교회를 가고 싶었다고 고백해 주었다. 만약 내가 다니던 교회가 강화도에 있었다면 자기도 나갔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감동이라니... 그 언니가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더 감동했던 거 같다. 그렇게 까지 나를 좋아해 준 사람이었는데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고 미안했다. 알면서도 못하니까... 나는 관계에 중독된 사람도 관계지향적인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관계가 넓어지면 피곤해하는 사람이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 성격이 어느 지역에 더 맞고 안 맞는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지역 특성을 떠나 내 성격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10월 초경이 강화도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골 살이를 강화도에서 하고자 왔을 때가 그때였다. 땡볕이 물러가고 살짝 찬 기운 섞인 바람이 솔솔 불 때 나뭇잎에 약간 노랗고 빨간 기가 얼핏 돌며, 기세등등하던 풀들이 힘을 잃었음이 완연할 때, 그때의 강화도를 보고 살고자 결정했으니까.
40대 후반에 갑자기 시골에 가서 살겠다고 하니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마치 유배나 보내는 것처럼 걱정하고 불안해하던 친지 자안들 때문에 너무 무모한 짓인가 내가 너무 독특한 사람인가 하며 살짝 흔들렸었다. 그런데 막상 강화도에 들어와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귀농귀촌 해서 자리를 잡고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외로 많았다. 어찌 보면 내가 늦게 입성한 셈일 정도였다.
5년 정도만 더 일찍 들어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들어 올 당시 귀농귀촌 붐이 일어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라 있었다. 강화도는 도시와 가까워 문화생활 하기도 좋고 수도권에 근접한 시골 중 이만한 운치가 있는 곳이 드물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아 부동산 가격이 날로 날로 올르고 있던 중이었다.
처음엔 전세 집을 얻었다. 덜컥 집부터 사기 불안했기 때문이다. 150평의 대지에 건평이 35평 정도였고 20평 정도의 작은 비닐하우스 텃밭이 딸려 있고 마당엔 잔디가 깔려 있는 하얀 조립식 주택이었다.
동남향이어서 햇빛도 잘 들어오고 큰 길가에서 뒷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조용하고 아늑했다. 이웃집들이 50m 정도로 대여섯 채 정도 적당히 떨어져 있었고 이 이웃엔 70~80 정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았으며 혼자 사시는 분도 있고 딸 손주와 함께 사는 대가족도 있었다.
시계가 90년대로 돌아간 듯한 작은 마을에서 귀촌이 아니 귀촌 예행연습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친정은 대전이다. 거기에 친정부모님과 오빠, 여동생이 살고 있다. 자주 가지는 못하고 일 년에 서너 번쯤 간다. 친정엄마는 전화도 잘 안 하고 자주 내려오지도 않는 나 때문에 항상 불만이 많다. 사실은 그게 불만인 건지 내가 엄마 뜻대로 살아 주지 않으니까 그게 불만인 건지 내 생각엔 두 번째일 가능성이 더 높다.
고등학교를 다닐 동안 까지는 너무나 모범생이었으므로 엄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그만큼 내게 바라는 게 많았을 걸로 짐작한다. 겉으로 드러나게 표를 내지는 않으셨어도 가끔 동네 아주머니들 한데 내 자랑을 했다. 그런데 대학교를 들어가고부터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부모님을 실망시켰다. 지나고 보면 나도 그때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났으니 말이지...
그때는 목숨을 걸었는데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나 겁쟁이에 소심하고 내성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그런 사람이 학생운동을 하다니 미스터리였다고나 할까. 80년대 군부독재 시절 그 엄중한 시절에 소리소문 없이 끌려가 흔적 없이 사라져도 어느 곳에도 호소하거나 항의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다행히 그런 극단적 상황까지 내몰리지는 않았어도 학내 학생운동권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위태 위태하게 대학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선 운동권과 단절하고 살았다.
아무리 정의로운 조직이라도 깊숙이 들어가 보면 비리와 헤게모니로 혼탁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맞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의 필요와 당위성은 인정했지만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그래서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하는 동안 선후배들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지워지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부모님 속까지 썩이며 언제 끌려 갈지 매일 조마조마했던 학창 시절의 민주화 운동 이력은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얻은 게 없었다. 한 가지 남은 게 있다면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는 선배들 정도... 소시민으로 평범하게 살다가 분기에 한번 그들을 만나 밥 먹고 술을 마신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목숨 걸고 치열하게 투쟁하던 사람들이 옆집 아저씨 아줌마의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걸 보면 그때 왜 그랬나 싶으니까. 물론 지금도 정치권에 서 진보 인사로서 일정 역할을 하고 있는 선배도 있지만 그들 조차도 학창 시절에 보았던 치열함이나 전투력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다. 모두 너무 일찍 애 늙은이로 살았던 거 같다.
어느 날 그 모임으로부터 갑자기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또 이런 급번개 모임도 당황하지 않고 토 달지 않고 잘 나간다. 학창 시절 학생운동을 하던 이력이 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잘 움직인다.
그땐 목숨 내놓고 오더를 수행했었으니까. 번개 모임쯤이야 가볍게 나간다. 누군가 술 생각이 났다 보다 하며 이유도 따지지도 묻지 않고 모인다.
식당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으려는데 먼저 와 있는 멤버 중에 낯선 아니 전에 없던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내 눈을 의심했다. M 선배였다. M 선배라면 지금 미국에 있어야 하는데 잠깐 귀국했구나 하는 생각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M 선배는 나를 보자 멋쩍게 웃었다. 나도 웃어 주고 싶었지만 나의 뇌리에서 웃어 주면 안 된다라고 제지했다. M선배가 반갑다고 손을 내밀었다. 손까지 뿌리 칠 수는 없어서 잡아 주었다.
"한국에 왔나요?"
"어, 3년 전에 들어왔어"
'뭐시라? 한국 들어온 지 3년이나 지났다고? 근데 난 왜 몰랐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군.'
살짝 꽤씸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그들이 왜 알려 주지 않았는지 알 거 같아 되려 민망했다.
'이 쉬쉬 하고 있구나 그런데 갑자기 3년 만에 왜 오픈한 거야?'
난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묘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날 그 자리는 나와 M의 눈치를 보는 어색한 자리가 되었다. 겉으로는 모두 태연 한 척했지만 티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모임이 끝날 무렵 M은 약간의 취기를 무기 삼아 호기롭게 내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가 번호를 주는지 안 주는지 눈치를 보는 장면이 순간 정지 한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선 듯 번호를 알려 주었다. 내가 치받지 않으니까 모두안심하는 것 같았는데 착각은 아니었겠지.
그다음 날 바로 M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같이 차를 마시자고 했다. 할 얘기가 있다면서.
"할 얘기 없을 텐데'라고 하자 M은 (명칭 생략)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소 도살장 끌려 나가는 기분이 약간 들었지만 미국에서 20여 년 살다가 한국 온 지 3년이나 되었는데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단 둘이서 마주 하고 앉으니 믿기지가 않았다.
대학교 3년 선배. 학생운동을 하다가 만났다. 잘 챙겨 주길래 따르다가 자연스레 커플이 되었지만 그 당시엔 운동권 내에서 연애는 금기시되었고 맘 놓고 드러내 놓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연애를 전혀 안 한 건 아니다. 드러내 놓지 않았을 뿐 암암리에 다 짝이 있었다. 누가 누구와 사귄다는 건 다 알고 있었다.
남자를 사귄 건 M이 처음이었으므로 모든 면에서 상황 파악을 잘 못했다. 서툴렀다. 사람이 안 볼 때 손 잡는 게 다였다. 프렌치 키스도 한 번 안 했으니까 애인이었다고 해야 하나 사귀었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어쨌든 자주 붙어 다녔으므로 남들이 볼 땐 깊은 사이로 오해했을 것이다.
붙어 다닌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M은 졸업을 하고 그의 고향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그때 M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M은 계속 만날 건지 헤어질 건지 결정하라고 했다.
그 말이 내게는 헤어지자는 말로 들렸다. 나의 의사를 묻는 말이 아니었다.
사랑한다면 어디 어느 곳에 있는 게 무슨 상관이람!
M에게 "나랑 헤어지겠다는 뜻으로 알겠어. 이 길로 서울로 간다면 다시는 날 만날 생각하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몇 달이 지났을 때 M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M을 만나러 나간 자리에 웬 여자가 같이 있었다. M은 내게 자기와 결혼할 여자라고 소개했다.
지금이야 "미친 거 아냐?"라고 화를 낼 수 있겠지만 그 당시 어리고 미숙했던 나는 상황 파악이 안 돼서 얼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M은 그 여자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2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갑자기 강남의 한 카페에서 내 앞에 앉아 있다니...
하고 싶은 말이 뭔지 해 보시지요 라는 의미의 손짓을 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옛날에 네가 나를 너무 매몰차게 밀어내서 단념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은 지금까지 너를 잊어 본 적이 없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었다."미친 거 아냐? 나하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 안 나?"
"네가 서울로 올라가면 끝이라고 하길래 어쩔 수 없었어. 부모님이 소개 한 여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어"
"잘했어. 근데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건데?"
"나 그 사람하고 이혼했어"
"응 그것도 잘했네"
나는 속으로 '이혼했구나 그런데 이혼하고서 나를 찾았다고? 어쩌자고?'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대학 시절과는 달리 M에게 끌리지 않은 걸 보면 그 당시 받은 충격이 엄청 컸던 모양이다.
그에게 깊은 불신이 생겨버린 것이다.
M은 자기가 살아왔던 얘기를 주절주절 풀었지만 그것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얘기를 들어주다가 시간이 많이 지나 담에 또 보자는 말을 건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M과 가끔 만났다.
그는 만날 때마다 내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받아 주지 않았다.
"선후배로 가자"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남편은 일 년 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의 아버지도 간암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위암 그의 큰 형도 지금 위암 수술 후 요양 중이다.
남편은 자기 집안에 암 유전자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암 불안증이 있었다. 건강에 신경을 아무리 쓴다 한들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항상 불안해했다. 그런데 유전자도 문제지만 성격도 문제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찌할 줄 몰랐다. 술과 담배로 풀었다. 매일 술을 마셨다. 이래서 힘들다 저래서 힘들다 하면서... 시아버지도 매일 술을 마셨는데 날이 갈수록 시아버지와 똑같이 닮아갔다. 걸음걸이며 말투까지도.
남편은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만 푼 건 아니었다. 여자로도 풀었다. 만나는 여자가 많았다. 늘 주변에 여자가 있었다. 그 들 중 몇 명과 깊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죽기 얼마 전엔 한 여자한테 미친 듯이 빠져 있었다.
마치 죽음을 앞두고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죽을 거야 라며 삶에 대항하는 것 같았다.
체면 따위도 차리지 않았다.
" 난 너한테 일도 애정이 없어 너는 나한테 여자도 아내도 아니야"라고 퍼부었다. 그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얼어붙었다.
결혼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그는 이혼을 입에 올렸다. 이혼하고 싶어 했다. 결혼 후 7년쯤엔 이혼도 할 뻔했다. 내게 이혼할 마음이 없는 것을 안 뒤론 지능적으로 괴롭혔다. 내가 바라는 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거나 일부러 화를 유발한다거나 사람들 앞에서 특히 다른 여자들 앞에서 대놓고 나를 무시하는 등.
못 견디면 먼저 이혼 유발 행동들이다. 그래도 난 이혼 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저 미치지 않을 정도로만 나 자신을 컨트롤하며 살았다.
두 아이가 유일한 낙이며 희망이었다. 이혼하기엔 애들이 너무 이뻤다. 그 예쁘고 착한 아이들이 새엄마의 손에서 큰다는 건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꼴을 보느니 차리리 죽는 게 나았다.
그래서 남편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내가 망가지더라도 아이들 만은 고스란히 지켜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아이들을 완벽히 지켜낸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 싸움을 걸어올 때마다 나는 맥없이 걸려 들어갔고 휘둘렸다. 싸우기 싫어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피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둘이 싸울 때 아이들은 잘잘못을 가릴 수가 없었다.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도 아빠도 똑같다고 생각했다. 똑같이 잘못한다고 생각했다.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을 붙잡고 아빠가 이랬다 저랬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이들한테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들한테는 아빠의 존재가 필요했다. 좋든 나쁜 든...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크게 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으로 볼 때 아이들을 위해선 나만 참으면 될 문제였다.
사는 동안 참 많이 되뇌며 살았다. "나만 참으면 된다. 나만 참으면 된다"를.
남편이 사람들 앞에서는 매우 젠틀하게 행동해서 밖에서는 남편의 이중성격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우리 남편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떠벌이지 않는 이상...
언젠가부터는 자기가 마치 애처가인 것처럼 행동을 하고 다녔다. 사람들 앞에서 내 칭찬을 한다거나 내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어 준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뭔가 작전이 바뀌었다. 그래서 또 많은 사람들은 남편이 정말로 애처가인 줄 알고 있다. 이런 경우를 쇼윈도 부부라고 한다지...
죽기 얼마 전 한 여자를 만날 때는 집에서 밥을 한 끼도 먹지 않았다. 일이 없는 날도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는데 그게 매우 규칙적이었다.
죽기 3년 전쯤부턴 나는 매일 혼자 밥을 먹었다. 어느 날은 저녁밥을 혼자 먹는데 갑자기 눈물이 후드득하고 떨어졌다. 가슴속 깊이 응어리져 있던 설움이 나도 모르게 삐져나온 것이다. 손을 쓸 새도 없이... 눈물이...
지금 생각해 보면 이혼을 해야 했다. 아이들의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이혼은 결국 그렇다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남의 이목 때문에 이혼을 못한 줄 알지만 아니다. 나 보다 아이들이 우선이었다. 그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평생 그런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한단 말인가.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다 극복될 일이었다. 나도 아이들도... 그땐 거기까지 미쳐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어쨌건 남편과는 백년해로할 인연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그가 죽었으니까.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일 년 정도 요양원을 들낙거리며 병치레를 하던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쇼크로 세상을 떠났다.
병치레를 하던 일 년 간은 여자가 없었다. 그 많던 여자들이 다 떠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한 여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는 거 같은데 만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때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그 몇 년 전에 운동을 하다가 남편이 아킬레스건이 끊어졌었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일이 그렇게 큰 부상인지 몰랐었다. 남편은 수술을 하고 한 달 정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퇴원을 하고서도 3개월가량 목발을 짚고 다녔다. 목발을 떼고서는 다리를 절뚝거리고 다녔고 그 후로 걸음걸이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 한쪽 다리를 씰룩거리며 절고 다녔다. 그게 완전히 돌아 온건 4년 정도 지나서 인 거 같았고 자전거를 타면서 상태가 좋아진 거 같았다.
그런데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내가 병원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병 수발 들어주는 것도 예를 들면 화장실 갈 때 도와준다거나 하는 일 그리고 병원 밥이 맛이 없다 하면서도 내가 반찬을 만들어 주겠다 하면 됐다고 말리고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병원에 가면 잠깐 있다가 빨리 돌아가기를 바랐다.
멍청하게도 그게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건 좀 지나치고 스텐스가 싸한데?라는 느낌이 들긴 했었다. 그래도 여자 때문에 나를 밀어내는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도 내가 간호해 주는 걸 고마워하지 않을 걸 보면 내심 그 마지막 여자가 와서 간호해 주길 바랐던 거 같다. 그러나 그 여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장례식도 오지 않았다.
불쌍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불쌍한 연놈들이라고.
화장이 끝나고 하얀 뼛조각들을 가족들에게 보여 주었다. '헉!'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나왔다. 너무 참담했으니까. 이래서 인생을 덧없다 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이 이토록 황망한데 살아생전 네가 그렇게 날 힘들게 했구나. 왜 그랬니...
진작 이혼을 했더라면 이런 꼴 저런 꼴 보지 않았어도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이혼을 안 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이혼을 결심하고 변호사와 상담하고 있는데 시한부 판정을 받는 바람에 이혼을 접었다. 그를 위해서? 아니다. 6개월 후엔 어차피 죽을 거 같았으니까.
6개월 이든 일 년이든 간암 말기인데 굳이 이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곧 죽을 거 같은데 내 호적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았다. 여태 껐도 참았는데 그깟 일 년쯤이야 라고 생각했다.
친정엄마한테 사위가 바람이 났다고 했을 때 엄마의 첫마디가 "천벌을 받을 놈!'이었다.
바람피우느라 마누라는 거 뜰 떠 보지도 않았다. 한 번은 와치를 집에 놓고 갔다.
와치를 들고 화면을 터치 하자 불륜녀와 톡 대화를 나눈 화면이 떴다.
출근하자마자 불륜녀와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대화 내용 중에 불륜녀의 생일 얘기가 나왔다.
생일은 월요일인데 언제 만날까요?라고 여자가 묻자 남편은 토, 일, 월 다 만나 그리고 생일 파티는 토요일에 해줄게라고 답을 했다.
두 사람이 아주 신이 나 있었다. 내 남편만 아니라면 응원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여자한테 아주 잘한다고...
불륜 증거로 캡처만 해 놓았지 그것으로 협박이나 고소나 싸움을 걸지 않았다.
어떤 형태의 싸움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싸우는 과정에서 내가 받을 상처가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이길 자신도 없었다. 보나 마나 만신창이가 된 후 내 팽개쳐지겠지. 사과를 하거나 곱게 보내 줄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너 아직도 젊고 이뻐. 나가서 다른 남자 좀 만나고 다녀"라고 말하는 사람하고 그 어떤 대화도 할 수가 없었다.
누가 자기한테 피해를 줬다고 생각되면 원수같이 미워하고 대놓고 무시하곤 했다. 자기 앞에 아무도 서 있지 않아야 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 자기의 적이었다. 심지어 자기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도 옷차림이 맘에 안 든다고 싫어했다.
낮과 밤을 그리고 집 안과 집 밖을 완전히 딴 사람처럼 살았다. 어느 게 진짜 그의 모습일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 보기엔 그 자신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누군지 모르고 살다가 갔을 수 있다.
남편이 죽기 일 년 전쯤엔 나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두 어달 가량 설사병에 걸려서 먹으면 바로 화장실로 가야 했다. 그래서 외출도 잘할 수 없었다. 몸무게는 8kg이나 빠졌다. 몰골도 내가 더 상해 있었다. 내가 먼저 죽을 거 같았다. 남편이 죽고 나서 서너 달 후에야 몸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살도 오르고 몰골이 조금씩 펴졌다. 곧 죽지는 않으려나 보다 했다.
건강을 챙기기 위해 운동도 하고 사람도 좀 만나고 일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강화도로 귀촌하기엔 좋으나 귀농을 하기엔 알맞은 곳이 아니다. 부동산 가격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조상에게 이어받아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면 모를까 귀촌한 이주민은 그 비싼 땅에서 농사를 지을 이유가 없다.
수도권과 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간직하다 보니 전원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시류를 타고 대북 사업이다 어쩌다 하면서 북한과 무역을 하기 위해 길을 만든다는 계획 때문에 자고 일어나면 땅 값이 올라있고 했다. 그러다 보니 부농이 많았고 시골에 살면서도 풍요롭고 여유가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텃세가 세기로 유명한 강화도로 와서 얻은 것이 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지인도 많아졌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었음에도 강화도에서는 사람들과 많이 자주 만나면서 그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매일 바빴다.
거기서 지내는 동안 자연환경에서 작업을 하고자 도시에서 이주한 예술인들에게 플루트, 도자기, 퀼트, 천연염색등을 배웠고 그곳 친구들과 골프도 치러 다녔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카페가 생긴다고 할 정도로 카페가 생겨서 아줌마들과 맛집 탐방과 더불어 카페 투어도 자주 다녔다.
여느 시골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대한민국에서 척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강원도 정선에서도 살아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년 정도 살았을 때 우연히 천연염색을 접하게 되었다. 집 근처에 있는 방직 공장에서 천연염색을 무료로 가르쳐 주고 게다가 점심까지 먹여 주는 3개월 과정의 천연염색 배움 과정이었는데 공짜 좋아하는 동네 아줌마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따라나섰다.
그렇게 천연염색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섬을 떠날 때까지 한 시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푹 빠졌다.
천연염색이 돈이 될 거 같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배우고자 몰려들었다. 그러나 섬에는 연구가가 없어 직접 재료 구입해서 혼자 연구했다. 공부를 하며 우리나라는 기후 때문에 천연염색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역사적으로 그 기록이 빈약해서 공부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옛날에도 염색 재료나 염색된 원단을 중국이나 인도에서 수입을 했기 때문에 왕족이나 귀족 이외엔 그 천으로 옷을 지어 입기 힘들었고 일반 백성들은 염색한 옷을 입을 형편도 안되었고 염색할 시간 여유도 없었다. 나라에서도 일반 백성은 염색한 옷을 못 입게 하다 보니 자연히 천연염색이 발전할 수 없었다.
고문헌 '임원경제지' '규합총서' '산가요록' 등에 부분 적으로 기록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천연염색만을 연구 기록한 책은 없는 걸로 안다. 우리나라는 귀족들이 쪽 염색을 즐긴 것도 아니고 평민들 중에도 극소수 만이 쪽 염색을 했기 때문에 기록이 거의 없는데 전라도 지방에서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 마저도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방해로 사라져 버렸다.
고문헌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염색재료(염재)였다. 빨강이나 보라색을 내는 염제는 우리나라에선 아예 구할 수 없으므로 수입에 의존하는데 많은 원단을 물들이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수공업에 높은 여무재 가격에 그러다 보니 제품이 비쌀 수밖에 없고 자연히 대중화되기 어려웠다.
그때 개인적으로 생각한 점은 이런 요인들 때문에 천연염색은 대중화보다는 예술 분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게 맞는 방향이었다.
자칭 타칭 천연염색 1세대라 칭하는 몇몇 대학교수들이 잠시 붐을 일으키는 데 까지는 성공했는데 더 이상 확산 시키지는 못했다. 또 천연염색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쪽 염색을 2세대 장인들이 독점적으로 선점하면서 방법을 너무 어렵게 레시피화 시켜 일반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지금은 어떻게 제자를 양성하고 있는지 자세히 모르겠으나 일부 장인들이 자기들만의 예술로 가져 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강화도를 떠나 강원도로 가게 된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천연염색이었다. 천연염색 공방을 꾸리려면 좀 더 큰 공간과 넓은 마당이 필요했다. 그래서 알맞은 장소를 찾다가 만난 곳이 정선이었다.
정선에서의 삶도 강화도에서 산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드라마틱했는데 천연염색을 하기 위해 갔지만 어이없게도 정선에서 천연염색을 접어야만 했다.
정선 집은 수돗물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마을마다 곳곳에 대형 물통을 설치해 놓고 거기서 물을 공급해 사용했는데 그 물은 지하수였다. 그런데 정선의 대부분의 지하수가 그렇지만 석회가 섞인 물이었다. 석회수. 석회수는 알칼리성이 강해서 천연염색을 했을 때 제대로 된 색을 뽑을 수 없다. 석회수를 중성화시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대량의 물을 막 쓰기엔 어려운 작업이었다. 또 염색을 하려면 매염제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이 매염제 때문에 천연염색이라는 명칭이 과연 합당한가 라는 문제로 많이 고민하고 염색장이 들과 논쟁이 많았다. 매염제가 암을 유발하는 강한 독성을 가긴 화화약품이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선 그런 매염제를 사용해선 안된다는 것이었고 화학제품이 들어가므로 천연이란 단어도 사용하면 안 된다였다. 그러나 화학 매염제 없인 천연염색을 할 수 없으므로 백번 양보를 해서 결국엔 입장을 서서히 바꾸려 하고 있었다.
정선에 들어 가 매염제에 대한 부담을 조금 내려놓고 벅찬 마음으로 첫 염색을 했다. 마당도 넓고 물도 맘껏 사용할 수 있어서 어느 때보다 기대가 컸는데 작업을 하면서 너무 놀라고 말았다.
석회수가 염색을 방해했다. 천에 물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미 염색된 것도 색을 뽑아 내 버렸다. 웬만해선 변색시킬 수 없는 감염색 천도 석회수에 들어가니 맥없이 탈색이 돼버렸다. 너무 허탈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알루미늄 매염제를 사용한 그 많은 물을 어디다 버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시골 마당... 지하수를 뽑아 올려 먹는 시골에 정화 시설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는가. 그냥 하수구나 마당에 버려야 하는데 당연히 땅이 오염될 것이다. 그래서 염색하고 난 물도 못 버리고 전전긍긍해야 했다.
두 가지 커다란 난관으로 인해 정선에서 천연염색 공방을 하고 싶었던 소망을 접어야 했다.
배우고 공부한 기술을 상품화시키지도 못하고 예술가의 반열에 들지도 못했지만 천연염색에 빠져 있을 동안 행복했으므로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 그 세계를 알았었다는 것 그 자체로 만족한다.
시골 생활이 풍요로웠다는 것 중 하나가 도시에 계속 살았더라면 천연염색 자체를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하루는 친청엄마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빛이 바래고 귀퉁이들이 조금씩 달아 없어져 버린 아주 오래된 손바닥 반 만한 사진이었다. 잘 보관하지도 않았었는지 희릿하고 실금도 많이 가 있었다.
받아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5~6살쯤 된 여자 아이와 남자아이가 손을 잡고 있는데 둘 다 발가벗었다. 두 아이의 표정으로 보아 어른들이 억지로 세워 놓고 찍었음이 분명했다. 인상을 쓰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여자 아이는 바로 나였다.
"얘는 나고 옆에 있는 앤 누구야?"하고 엄마한테 물었다.
"그 애가 민호야"
"민호? 민호?... 누군 지 모르겠는데 "
'옆집에 살던 민호야"
"옆 집에 그런 애가 살았었어? 근데 왜 발가벗겨 놓고 사진을 찍었어?" 하고 묻자 엄마는 옛날 생각이 나는지 배시시 웃으며
"민호 엄마랑 한 장씩 나눠 가졌었어."라고 했다.
"민호라는 애는 어떻게 됐어? 지금은 어디 살아?" 하고 물었다.
"서울로 이사 갔으니까... 네 오빠하고는 가끔 연락한다던데..."
그런데 오빠는 민호에 대해 내게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허긴 평소 되면 되면 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로 잘 연락도 안 하는데 이런저런 얘길 나한테 살 살갑게 할 리가 없지.
민호는 어릴 적 한 동네에 살던 동갑내기 사내아이였다. 나는 그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민호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5~6살 때니까 당연히 기억이 안 나겠지. 엄마는 그 사진을 나보고 보관하라고 했다. 딱히 가지고 있을 이유는 없었지만 귀한 어릴 적 사진이어서 받아왔다.
집에 와서 그 사진이 생각나서 다시 한번 더 들여 다 보았다. 오동통 동굴 동굴 귀엽다. 미간이 찌푸려지도록 인상을 쓰면서 꼭 다문 입술이 고집 센 개구쟁이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민호도 민호와 이런 사진을 찍었다는 기억도. 다만 궁금해졌다. 이런 사진을 찍을 정도로 엄마들 사이가 이무로 왔나 본데 민호는 어떻게 자라고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그 사진을 작년에 사용했던 수첩 사이에 고이 끼워 넣었다.
40년의 세월이 흐를 동안 사진 속에서만 존재했던 민호라는 사람을 생전에 다시 만날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남편 옆에는 깊건 얇건 늘 여자가 있었고 여자와의 사이가 깊었을 때는 나와 이혼하려고 갖은 야비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남편한테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내는 모를 수가 없다. 온몸의 느낌과 감정으로 알 수밖에 없다. 부모보다 아내와 산 세월이 더 길 땐 더욱 그렇다. 큰 아들 키우는 것처럼 매일매일 조마조마하다. 출근하면서 현관문이 닫히면, 늘 문을 닫고 뒤돌아 서는 순간부턴 내 남편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가슴을 졸이며 살면서 왜 뒷조사를 해보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증거를 잡으면 바로 이혼인데 오랫동안 이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막연히 여자와 막장까지 가진 않겠지 하며 넘기곤 했다.
늘 마음이 다른 여자한테 가 있는 남편과 사는 아내가 어떤 심정으로 사는지 여느 아내들 그런 남편이 아닌 사람과 사는 아내들은 절대로 모른다. 마치 자식이 죽은 엄마의 심정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또는 이성적으로만 이해할 뿐 인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러쿵저러쿵 위로를 하지만 다 쓸데없다. 남편이 바람을 났다는 사실을 알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저수지로 달려가 생을 마감하는 아내의 심정을 여느 아내들은 알 수 없다. "바보 같다. 그렇다고 자기 인생을 버리냐"라고 대부분 말할 것이다. 내 인생을 챙겨야지라는 야무진 생각을 판단을 내릴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으려면 그 아내는 평소 남편을 등한시했거나 그녀도 역시 이혼할 마음을 늘 품고 있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자신도 바람 중이거나... 이 중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 중 어느 것 하나도 내겐 없었다. 내 머릿속엔 내 가슴속엔 '이혼'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이혼을 요구하는 이유는 "안 맞는다"였다. 안 맞는 게 아니다. 내게 안 맞추는 것이다. 맞추어 주면 내가 계속 희망을 품고 자기를 놔주기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공처가 애처가 인 척한 것은 여자가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연극이었고 단둘이 있을 때는 무관심 한 척, 부탁 안 들어주기, 일부러 내가 싫어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내 애를 태웠다. 내가 자기한테 질리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부턴 네 인생 내 인생이 있는 줄 몰랐다. 부부는 알콩달콩 또는 티격태격하면서 죽을 때까지 온갖 세상 난관을 극복하며 함께 가는 것으로 알았다. 요즘 세상에 이혼은 흠도 아니고 별거 아니다. 많이들 이혼하고 잘 산다라고 하지만 그 말은 정말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 일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암에 걸리고 죽기 전 2~3년 동안은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아니 비열하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때는 이혼하자는 말이 빈 말이 아니란 걸 괜한 투정 부리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그 당시 만났던 여자와 진정으로 같이 살고 싶어 한다는 걸 못 느낄 수가 있었다. 나도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혼을 해 줄까 말까를.
불행은 겹쳐서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이 있다.
남편의 학대가 점점 심해지던 시기 모텔 사업을 하던 친정이 부도가 났다. 2~3년 전부터 사업이 어렵다는 걸 알았지만 아버지가 공개를 하지 않는 바람에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혼자서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고 상황을 아무에게도 상의하지 않았다. 70대 노인이 혼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어서 5층 짜리 모텔 건물이 고스란히 은행으로 넘어갔고 부모님은 자식들이 마련해 준 15평 아파트로 허겁지겁 옮겼다. 모텔 1층 부모님 살림 집에 있던 물건만 겨우 챙겨 나올 수 있었다. 파산이 이렇게 가혹하단 사실도 당하고야 알았다. 말 그대로 정말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쫓겼다.
그 일을 겪고 부모님은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자식들이 여러모로 보살펴 드려도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칠 데로 지쳐 기력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의 병환이 심상치 않았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했던 평생 일군 재산을 모두 날리자 그 허망함과 허탈함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런 차에 아버지도 사위의 불륜 소식을 알게 되었다. 자식들이 아무리 쉬쉬해도 당장 집안이 쑥대밭이 됐는데 사위가 콧베기도 안 보이니 그런데 사위가 처갓집에 안 오는 이유가 바람난 게 아니라면 뭐가 또 있겠는지 노인네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모를 수가 있을까. 친정에 간 어느 날 아버지가 날 불렀다.
" 선희 어미 이리 와 바라."
아버지의 굳은 표정과 가라앉은 목소리가 왠지 사위에 대해 물어보려는 게 아닐까 불안했다. 아닌 게 아니었다.
"박서방 바람났냐?"
눈치를 살피거나 돌려서 말하지 않는 성격이시다. 준비할 틈도 없이 훅 들어온다.
"예"
나로서도 감추거나 돌려 말하고 않았다. 사위가 친정에 나타나지 않는 적절한 거짓말을 갑자기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아니 진작 알고 있었다는 오히려 당신의 짐작이 맞은 것에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큰 침을 꿀꺽 삼키셨다.
"너 하고 살기 싫다더냐?" 다시 물으셨다.
"네"
"그럼 내쫓아라. 네가 나가지 많고 선희 아비를 내쫓아라"
"네. 그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안심 아닌 안심을 시켜 드렸다.
아버지의 당부 말씀은 결국 내게 유언이 되었다.
그 후론 사위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으셨다. 친정에 가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힘 빠진 눈동자로 입을 꾹 다문 채 가족들의 움직임 만을 응시했다. 안 그래도 말이 없어 중요한 말만 하시는 분이 그나마 없어지셨다. 서너 달 후에는 풍 맞은 것처럼 반신 마비가 왔다. 조금 더 후엔 숟가락도 못 들 지경이 되었다. 가족들은 날로 쇠하여지는 아버지의 건강에 당황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렇다.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와 있다는 걸 모른다. 아파도 애써 죽음과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연관 지으려 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죽음은 정말 갑자기 온다는 것이다. 건강아 나빴던 사람도 서서히 말라 가다가 죽음은 예기지 못한 순간에 급작스럽게 온다. 죽는 순간은 본인 밖에 모른다. 본인도 모를 수 있다.
내 생각엔 죽기 1~2초 전엔 알지 않을까 싶지만 알 수 없다.
엄마의 건강도 여의치 않았기에 아버지의 간호를 엄마 감당하기 힘들었다. 급기야 간호를 하던 엄마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간호하다가 과로하셨나 했는데 병원에서 알게 된 사실이 염증이 생겨 오른쪽 다리가 벌겋게 퉁퉁 부어올라 있는 것이었다. 자식들한테 말도 안 하고 감당하고 있었다. 자식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러다 줄초상 나겠다 싶었다.
염증을 치료하고 부기를 내린 뒤 일주만에 퇴원한 엄마는 당분간 다리를 쓸 수 없었다. 될수록 걷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들 넷과 사위 둘이 모여 의논한 끝에 일단 엄마를 아버지에게서 떼어 놓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 달 정도만 요양원에 계시도록 했다. 한 달만 계시라고 엄마 치료가 끝나면 모시고 오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상황이 절박한지라 아버지도 쉽게 기꺼이 동의했다.
자식들은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아버지가 요양원엔 절대 안 가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때부터 또 차원의 고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내 보기엔 재산을 말아먹어 자식들한테 물려줄 것도 없는데 막판에 부담이라도 덜어 주자는 마음이신 것 같았다. 사실 그때 아버지가 안 가겠다고 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려도 되었다. 그러면 우린 또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 그런데 아버지는 순순히 우리의 요구를 따랐다.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이런 사실에 우린 가슴이 더 아팠다.
'아버지 그냥 그때 안 가겠다고 하시지 그랬어...' 우리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
집 근처 시설이 비교적 깨끗한 요양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 입원 수속을 하고 요양사의 안내로 정해 진 방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방이었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두 사람 다 워낙 연로하니 큰 말썽은 없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체념하는 눈치였고 한 달만 견디자고 다짐하는 듯 보였다.
아버지를 침대에 누여 드리고 옷가지를 정해진 서랍장에 정리해 놓았다.
"아버지, 한 달만 참으세요. 한 달만."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애원하 듯 간곡히 부탁했다.
눈을 감은 채 아버지는 대답은 안 하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서운함 서러움 불안함 등 모든 부정적 감정을 애써 누루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지만 당장은 이게 최선이었다. 아버지가 한 달만 견디면 가족 모두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필이면 왜 내가 아버지를 요양원에 입원시켜 드렸을까. 너무 마음이 무겁고 미안하고 안쓰럽고 불쌍해서 뒤 돌아 나오는데 가슴이 시렸다. 나도 서러웠다. 불행은 왜 한꺼번에 밀려드는지...
남편이 제 인생 찾겠다며 여자에 빠져 가족도 팽개치고 밖으로 나도는데 그런 꼴을 보면서 나도 거의 반 미쳐버린 거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잘 돌봐드리지 못했다.
여자를 찾아 가 머리채라도 부여잡아야 되나, 이것저것 다 내려놓고 남편을 보내 주어야 하나 이혼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에 한 시도 맘이 편하지 못했다.
밥 맛도 없고 잠도 잘 못 잤다. 아픈 엄마와 아버지를 돌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 시계는 그때까지도 남편을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