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8여 년을 강화도에서 친구들 덕분에 잘 살았지만 그 다른 한 편으로 그곳은 내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곳이기도 했다.
남편의 마지막 바람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왜 아름다운 강화도를 탓하느냐는 질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남편과 함께 했던 추억(결코 아름답지 않은거짓 추억)이 곳곳에 서려 있으므로 마음을 다 잡기가 힘들었다.
그 당시 도시와 강화도에 각각 집이 한 채씩 있었다. 별거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곳을 선택하기로 했는데 나는 강화도의 집을 택했다.
번잡한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자 마음이 산란해서 강화도에서 계속 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른 곳으로 간다면 어디로??라는 생각이 들자 막연했던 생각이 구체화되었다.
우선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부터 해서 바다라면 어디? 또 산이라면 어디? 등등...
바다도 좋았지만 산 쪽이 더 당겼다. 아마 그때 누군가가 아니면 무언가가 산 쪽에서 강하게 나를 끌어당긴 거 같다.
번뜩 강화도로 오기 전부터 생각했었던 강원도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꼭 강원도로 가자. 더 깊은 산골로..."
사실 강화도는 시골이기는 해도 수도권에서 가까운 유명 관광지다 보니 늘 관광객과 차로 번잡스러워 시골의 정취를 만끽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더 깊고 더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으론 걱정이 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남편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너무 크다 보니 산골에서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을 눌러 버렸다.
남편이 바람났는데 세상 무서울 게 뭐 있나라는 웃기지도 않는 호기가 생겨났다.
그만큼 빨리 강화도를 떠나고 싶었다.
그때부터 강원도에 적당한 곳이 있는지 눈이 빠지게 인터넷에서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했다. 막연하게 직접 찾아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다 알게 된 곳이 정선의 어느 산골 마을에 있는 집이었다.
강원도 쪽을 전문적으로 해서 귀농귀촌인을 상대로 부동산 사업을 한다는김사장이란 사람도 사이트에서 찾았다. 영월에 사무실이 있는 김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 물건을 보자 하고 약속을 잡고 며칠 뒤 영월까지 차를 몰고 가 김사장을 만났다.
김사장은 내가 보자고 한 물건이 나온 지 일주일 밖에 안 됐고 내 전화를 받고서야 그런 물건이 나온 지 알게되었다며 오히려 어떻게 찾았냐며 신기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전문가도 미처 몰랐던 물건을 인터넷 검색으로 내가 발견한 것이다. 김사정은 내 전화를 받고 다급히 그 물건에 대해 조사했을 것이다.
김사장과 둘이 그 황토집으로 향했다.
강원도에서도 정선이라면 딱 한번 교회에서 지인 가족과 함께 아이들 까지 다 데리고 하이원에 간 것이 다였다. 하이원리조트에서 2박 3일 묵으며 근처를 여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말고는 정선에 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김사장과 함께 영월에서 정선으로 가는 길은 초행이나 다름없었다. 강원도의 산 세는 강화도 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깎아지른 듯 높고 가파른 고개를 서너 개는 넘었다. 그 산 세에 기가 눌려 점점 무서워졌다.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돌아가자고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마을이 나타났고 드문드문 집들이 보였다. 차 한 대 지날 수 있는 어느 좁은 골목길을 따라 30도 정도의 오르막 길을 150m쯤 들어가자 길 양쪽으로 집이 한 채씩 있었다. 하나는투박한 황토벽돌집이었고 하나는 하얗고 예쁜 조립식 주택이었다. 내가 볼 집은 왼편에 있는 황토벽돌집이었다. 여기는 해발 450m이다.
지붕을 검은색 아스팔트슁글로 덮은 나지막한 단층 황토벽돌집이다.
대지는 200평 정도고 건평은 26평이다. 그러니까 마당이 넓다.
집 앞쪽으로 한 턱 내려가서 150평 정도의 텃밭이 있다. 150평 이면 텃밭 치고는 꽤 아니 아주 넓은 것이다그리고 집 뒤 쪽으로 경사가 30도 쯤 되는 3000평의 넓은 밭이 연결되어 있다.
이 집의 내부 마감은 소나무와 황토 벽돌로 되었고 천장을 지름 100cm 정도 되는 길고 커다란 소나무 서까래를 가운데 놓고 가느다란 소나무를 갈비뼈 마냥 서까래 양쪽으로 가지런히 받쳐 놓아 마치 통나무 펜션에 온 거 같은 분위기가 났다.
벽은 황토 벽돌에 한지를 발랐고 전경을 가리지 않으려고 앞 산을 향해 전면에 큰 통창 하나와 옆으로 통창과 같은 크기의 미닫이 창을 하나 더 만들어 열고 닫게 할 수 있게 했다. 마루는 시골 답지 않게 고급스러운 강화 마루를 깔았는데 소나무와 아주 잘 어울리고 천연 나무라 그런지 밟는 느낌이 좋았다. 마치 옛날 초등학교 시절 교실 마루를 밟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방 두 개와 주방 그리고 거실 화장실의 구조였다.
전체적으로 대지가 200평, 텃밭이 150평, 밭은 3000평인 넓은 땅이었다.
현관문을 몇 번 두드리자 바깥 주인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집주인이 우리를 반기지도 않고 너무 퉁명스러워서 집 파는 거 맞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은 집 뒤 밭과 텃밭을 대강 보여주고 집 내부는 집사람이 있다며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집 안으로 들어가자 뾰로통한 표정의 부인이 주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인사도 안하고 우리를 피하 듯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김사장과 나는 불청객 같아 뻘쭘해졌다.
보고 가라는 식으로 집에 대한 설명도 안 하고 서로 겉도는 폼 새가 둘이 크게 싸운 거 같았다. 당황한 김사장이 나서서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주인을 제치고 더 열심히 설명을 했다.
김사장의 설명이 끝나고 바깥주인한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김사장이 미안했는지 그제야 실토를 했다. 자기도 상황이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었던 거 같았다.
김사장 말에 의하면 바깥 주인은 돈이 급해서 집을 팔려고 하고 안 주인이 막무가내로 안 팔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싸운거 같다고 했다.
"나 참!" 어이가 없었다.
"둘이 결정을 한 후에 집을 내놔야지 집 내놓고 싸우고 있으면 어쩐데요"라고 내가 말하자 김사장도
"그러게 말입니다." 하며 난감해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알고도 나를 데려간 김사장은 또 뭐람...
주인이 팔지 안 팔지 결정을 못했다니 흥정할 도리도 없고... 구경 잘한 것으로 위안 삼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