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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일 Jun 24. 2020

20. 선물

“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공원마다 사람이 넘쳐난다. 경쟁하듯 꽃망울을 터뜨리던 벚꽃들이 선명한 청록색 스커트로 갈아입은 지 오래다. 스치는 가족들 속에 아가들은 한껏 꿈에 부풀어 있다. 어린이날이 코앞인 것이다. 재잘재잘 나름의 이유를 들어 선물을 호소하느라 바쁘다. 그저 이뻐 보이는 듯 부모들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대답한다.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스치며 들어온 병원은 왠지 더 차분해 보였다. 팀장과 간병인들이 둘러앉아 분주하다. 인사를 하고 지나치는데 못 보던 물건들이 펼쳐져있다.
“팀장님. 알바하세요?”
인사를 하고 건넨 농담에 팀장은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 알바라도 해야 하나! 노인네들 드릴 꽃이야”
“무슨 꽃이여?”
“내일모레가 어버이날이자나. 자식들도 안 들여다보는 노인네들이 대부분인데 우리라도 해줘야지”
“고생 많으시네요. 엄마는 저희가 해드릴 거니 안 하셔도 돼요”
“이미 빼놨지. 눈치가 백단인데”
웃는 팀장의 미소에는 씁쓸함도 함께 묻어있었다. 자식들에게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한 사람의 부모로서 팀장도 마음 아파했다. 생각해보면 가슴에 꽃 한 송이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그 의미는 생각보다 컸다. 지난 세월 자식들을 위해 고생한 부모에게 드리는 훈장과도 같은 선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후 병실 침대 벽에는 카네이션이 같은 높이 같은 위치에 일렬로 걸려 있었다. 엄마와 바람할배의 벽만 비어 있다. 보호자가 자주 들르는 어른들은 빼놓은 것이다. 매년 이루어지는 5월의 풍경이다. 처음에는 생화로 이쁘게 준비했었다. 건조한 병실에 화려한 색깔의 카네이션은 나름 분위기를 환기시켜주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팀장이 다음에는 조화로 하라고 조언해주었다. 화려했던 꽃이 시들어가는 것 조차 어른들에게는 좋지 않다는 것이다. 벽에 붙어있는 꽃이나 협탁에 놓인 꽃을 누워있는 어른들이 못 볼 것 같지만 다 보고 있다는 얘기였다. 항시 그대로 있는 종이나 천으로 된 조화가 오히려 더 격려가 된다고도 했다. 병실은 어버이날을 시작으로 5월 내내 꽃을 붙여놓고 어른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 일을 경험하고는 누이들과 상의해 조화로 준비하게 되었다. 며칠이고 환한 꽃을 보실 수 있도록 했다. 어버이날 이른 저녁 엄마 옆에 앉아 나는 마음껏 사랑 표현을 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한동안 카네이션을 바라보셨다. 휴대전화로 누이들과 아내 그리고 희망이의 목소리도 들려드리고 분주했다. 엄마는 흐뭇하게 인사를 받으시고 가만히 잠이 드셨다. 때마침 온 저녁 식사를 챙겨드리는데 또자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카네이션이네?”
“네. 할머니. 1년 내내 달아드려도 모자라겠지만 이럴 때라도 해드려야죠”
“고마운 날이야. 이런 날이라도 있어야지”
“자제분들은 다녀가셨나요?”
“못 온 지 오래야. 살기 바쁜데 어쩌겠어.”
“다들 멀리 있나 있나 봐요?”
“지방에 있지”
“다들 지방에 있는데 할머니를 왜 서울에 있는 병원에 모신 거예요?”
“입원할 당시에는 서울에 있었지. 그러고 1년 후인가 지방으로 내려간 거야. 일도 그렇고 사는 것도 빡빡하니까. 서울에 있을 때는 자주 왔었어.”
“보고 싶으시겠어요. 자주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사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나. 그러려니 해야지. 그나저나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부탁이요?  말씀하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드리죠”
“나 백합 한 송이만 가져다 줄래?”
“백합이요?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죠. 근데 이유를 여쭤도 되나요?”
“보고 싶어서. 우리 신랑이랑 애들이 항상 선물로 주던 꽃이 백합이거든”
“백합을요? 꽃에 추억이 있으신가 봐요?”
“백합이 ‘순수’라는 의미가 있는 꽃이야. 우리 신랑 덕에 알았지. 많이도 아니고 언제나 한 송이씩 선물로 주곤 했어, 신랑이.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애들도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 대신 백합을 선물로 주곤 했어.”
“멋진데요. 할아버지가 아주 로맨티스트셨네요. 백합에 그런 뜻이 있는지 몰랐어요”
“신랑 마음이 담긴 백합 한 송이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었는지 몰라. 이 맘 때 되면 그 은은한 향기가 그리워져. 고단했던 삶이 유리창에 뿌린 거품이 물에 쓸려 내리듯 깨끗해지는 것 같거든. 부탁해도 될까?”
“네, 알겠어요.”

나는 주무시는 엄마의 볼에 입을 맞추고 바로 병원을 나왔다. 다행히 병원 근처 지하철역 쪽에 작은 꽃집을 찾았다. 화려한 꽃들이 경쟁하듯 바라보는 꽃집을 들어서자 왠지 마음이 설렜다. 백합 한 송이를 주문했다. 꽃봉오리가 쌀짝 입을 다문 백합 한 송이를 꽃집 주인은 정성스레 투명한 비닐로 돌돌 말아 포장을 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네송이를 더 달라고 했다. 의아한 듯 쳐다보던 주인은 냉장고 문을 열고 꽃을 꺼냈다. 문득 할머니가 말한 ‘순수’라는 꽃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병상의 모든 친구들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작지만 병상에서 기나긴 인내의 싸움을 하고 있는 어른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한 송이씩 포장된 백합을 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손에 들린 꽃을 바라보며 간호사들도 간병인들도 특별한 말 없이 흐뭇한 미소를 건넸다. 나는 팀장에게 종이컵을 부탁하고 물을 담았다. 그리고 엄마를 비롯한 네 분의 어른들 머리맡에 백합 한 송이씩을 꽂아 놓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팀장이 꽃향기가 좋은 듯 손에 낀 비닐장갑을 벗으며 다가왔다.
“왠 백합이야? 갑자기 나가길래 가나보다 했더니...”
“부탁을 받아서요.”
“부탁? 누가 사다 드리라고 한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닌데. 어떤 잠보 어르신이 러브스토리를 말씀하시면서 백합을 좋아하신다고 부탁을 하셔서요. 백합이 순수라는 뜻이 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저도 맘에 들어서 엄마랑 옆에 친구분들 것도 사 왔어요.”
“잠보 어르신이면 또자 할멈? 뭔 소리야. 갑자기... 아무튼 좋으네. 오랜만에 꽃향기를 다 즐기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잠보 어른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나도 모르게 할머니 얘기가 나와 조금 당황했지만 나름 설명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팀장은 은은히 퍼지는 백합 향기에 코끝이 바쁘게 움직였다.
“고맙네, 고마워. 아들!”
또자 할머니가 인사를 했다. 엄마 너머로 누워있는 또자 할머니를 바라보니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음에 담아놓은 작은 선물들이 마치 작은 끈처럼 모두의 삶을 붙잡고 있는 듯하다  꽃 한 송이를 그리워할 수 있는 그 순수한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진다. 문득 돌아보니 엄마는 내게 사랑이 담긴 소소한 선물들을 많이 해주셨다. 해 뜨는 새벽 귀갓길에 아들을 위해 사 오시던 아이스크림, 둥글둥글한 몸으로 즐거이 춤추며 다가오던 모습들, 반신을 못 쓰면서도 아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해주시던 모습들... 끝없는 선물의 추억이 밀려왔다. 배합 옆으로 보이는 어른들의 얼굴이 왠지 생기가 돌아 보였다. 은은한 향기에 이끌려 모두가 일어나 꽃잎에 코끝을 마주할 것 같아 보였다. 백합만큼이나 하얗게 빛나는 얼굴의 엄마를 보며 지금 병상의 시간이라는 최고의 선물에 감사했다. 어버이날 선물은 내가 받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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