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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일 Jun 26. 2020

21. 표정

“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고마워.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어”
“아니에요. 팀장이 고맙다고 전해 달래요”
“하하, 나도 들었지. 너도 능청맞게 얘기 잘하더라”
“할머니랑 이렇게 얘기하는지 알 수 없을 텐데 걱정할 것 없죠. 시원하기도 했어요. 있는데로 얘기하니까”

또자 할머니는 몇 번이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꽃 덕분에 웃음소리를 다 들려주셨다. 어버이날 선물한 백합은 팀장이 정성껏 물도 갈아주고 챙겨준 덕에 일주일 이상 피어있었다. 물론 벽에 붙은 카네이션은 그대로였다. 다른 어른들도 갑자기 나타난 꽃 친구 덕분에 향기로운 며칠을 보내신 듯했다.

“배고파도 좋아하고, 야옹이는 왠일로 고개를 돌리고 꽃만 보고 있고. 바람이는 뾰로통”
“다들 좋아하신 듯해서 마음 뿌듯한데요”
갑자기 배고파 할머니가 끼어들었다.
“언니가 부탁한 거야?”
“내가 이쁜이 아들에게 부탁했지. 나 보려고 부탁했는데 고맙게도 너희들 것까지 다 가져왔지 뭐야”
“고맙네 아들. 약 냄새에 취해 살다가 꽃향기에 취하니 온몸이 날아갈 것 같았어. 언니 덕에 우리도 호강했네”
“그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어요. 너무 다행이에요. 엄마도 좋으신 듯 혈색이 밝아 보여서 저도 좋았어요”
“좋은 표정이야. 우리가 보는 표정은 또 틀리거든. 그치 언니?”
“그럼 그럼. 이쁜이도 좋아하고 있어”
나를 격려해주고 싶으셨는지 정말 그런지 두 어른들은 말했다. 엄마도 좋아하신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어른들이 보시는 게 틀리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배고파 할머니 얘기 중에 한 말이 궁금해 나는 물었다.
“배고파 말데로 보이는 게 좀 틀려. 어쩔 수 없겠지. 현실에 보이는 거랑 우리처럼 보는 거랑 좀 차이가 있지. 우리가 보는 거는 뭐라 해야 할까... 마음으로 보는 거라고 해야 하나?”
“그래 언니. 마음으로 본다는 게 괜찮은 표현 같은데!”
또자 할머니는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는 아니니까. 너도 지금 우리랑 대화하는 게 귀로 듣느게 아니지?”
“네, 그럼요. 제 귀에 들리는 거면 다른 사람들도 듣겠죠”
“마음으로 듣는 거거든. 똑같아. 보이지 않는 표정이 있단다. 아무튼 이쁜이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그리 알아.”
“고마운 소식이네요. 가끔 사다 드려야겠어요”
“그래그래. 그렇게 해”
가만히 듣고 있던 배고파 할머니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언니 요즘 표정이 안 좋은 것 같던데? 몸이 안 좋은 거야?”
잠시 뜸을 들이던 또자 할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느낌이 좀 그래. 꽃 향기가 좋아 한껏 기분 좋았는데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 보니 뭔 일이 있으려나 싶다”
“잘 넘어가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요”
“걱정은 무슨.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두려울 게 있나”
“그렇기는 해도 나는 매번 무섭던데.”
영문을 모를 어른들의 대화였다. 표정이 안 좋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대화가 무거웠다.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나는 답답함에 물었다.
“갈 수도 있다는 얘기야.”
또자 할머니가 말한다.
“간다고요? 죽는다는 건가요...?”
“그래. 죽을 수도 있다고. 살 수도 있고. 근데 죽을 모양새야, 이번에는. 느껴져”
“그럼 빨리 어떻게 해야죠?”
“뭘 어째. 꽃이 피면 시들어 떨어지고 다시 피고 하는 거지.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말을 잊지 못했다. 초연한 할머니의 말에 더 말문이 막혔다. 듣고 있던 배고파 할머니가 말했다.
“언니 말이 맞아. 굳이 두려워하고 피할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방법이 있다면 여기 누워있겠니. 언니가 그렇게 백합 보고 싶어 하더니 소원 풀어 마음 내려놓았나 보네?”
“그러게. 정말 보고 싶었는데 이쁜이 아들이 소원 풀어줘서 후련해졌거든. 이제 미련이 없어. 신랑도 보고 싶고”
“언니도 참. 가면 신랑이 마중 나와 있는데?”
“네가 아냐, 내가 아냐. 내가 원하면 그만이지. 우리 신랑은 나 기다리고 있을 거야!”
“참 소녀 같아. 그러고 보면. 참 좋겠수.”
“좋지 좋아. 누워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힘들긴 하지. 하하. 아들은 너무 놀라지 말고. 저래 얘기해도 금방 어떻게 되고 그런 것 아니니까”
경험하지 못한 어려운 얘기였다. 항상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내용이었다.
“배고파 말대로 걱정 말어. 그리고 정말 고맙다. 네 덕분에 정말 소원 푼 거야. 자식들이야 지들끼리 잘 살면 더 바랄 게 없으니. 사람이란 게 참 묘하거든. 이렇게 누워서 저 꽃 향기가 그렇게 그립지 뭐야. 사막에 홀로 남겨져 목말라죽기 직전의 사람이 물을 찾듯이 말이야. 네가 물을 준거야. 다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거지. 나에게 백합은 그런 존재였거든.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생명수 같은 존재. 아무튼 고마워. 배고파도 내 표정 신경 쓰지 말고”
“지금 보니 괜찮은 것 같은데. 무슨 걱정이야. 언니도 마음 내려놓지 말고...”
왠지 다른 때와 다른 쓸쓸함이 전해졌다. 아쉽고 아쉽다. 할머니의 말이 어떤 뜻인지 알지만 아쉬웠다. 내가 왜 그리 아쉬움에 젖어드는지 모르지만 너무나 아쉬웠다.
“그 표정이라는 것이 너무 궁금하네요. 저도 볼 수 있다면 어떻게든 도울 수 있을 텐데요”
생각에 잠겨 있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뭘 도와. 네가 돕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야. 사람 목숨은... 그리고 너도 표정을 느낄 수 있을 때가 올 테니 지금처럼 마음 다해서 엄마 잘 해 드려.”
또자 할머니는 달래 듯 차분히 내게 말했다.
“그럴까요? 저도 느낄 수 있을까요?”
“마음을 다하면 느낄 수 있게 되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스치는 눈길에도 서로 마음을 느끼는 것처럼 느껴질 거야. 어떻게 하려 하지 말고 차분히 네 길을 걸어가면 돼”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답답했다.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병상을 마주하는 내내 쌓여온 답답함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루하루 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고 있지만 병상의 안개는 걷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속에 표정을 느껴간다는 얘기는 안갯속에 빛을 찾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다한 꽃 한 송이에 저토록 기뻐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선명하다. ‘엄마는 뭘 원하실까?’ 머릿속을 맴돌며 메아리치고 있다. 엄마의 표정은 편해 보이시기만 했다. 너무나 편안하고 인자한 표정이 얄밉기만 했다. 순간 창문에 비친 내 표정이 보였다. 쾡하다. 엄마가 걱정하실 것 같은 피곤한 모습이었다. 표정은 마음을 비춘다. 내가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 동안 엄마는 나의 표정을 걱정하고 계시지는 않았을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또자 할머니 머리맡에 붙여진 카네이션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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