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일상이 변해버렸다. 고향에 살고 있는 작은 누이의 집은 우리 삼남매의 거점이 되었다. 형제들은 중환자실 면회 시간을 기준으로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엄마는 입원하고 얼마 안돼서 눈을 뜨셨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엄마의 이쁜 눈동자를 보게 된 것만으로도 모두가 기뻤다. 그리고 아무리 불러도 또렷한 반응이 없는 엄마를 바라보며 답답함과 두려움도 함께 다가왔다.
우리 삼남매에게는 엄마의 중환자실이 두 번째 경험이다. 남편 없이 홀로 포장마차를 하며 꿋꿋이 삼남매를 키워오시던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던 십수 년 전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뇌출혈로 처음 쓰러지셨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내게 담임 선생님께서는 서둘러 병원으로 가라고 전해주셨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누이들은 학교에 전화를 걸어 나에게 소식을 전했다. 자전거를 끌고 급히 찾아간 병원 통로. 만삭의 큰누이와 아직 젖살이 안 빠진 풋풋한 성인의 작은 누이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멍하니 울고 있는 누이들을 찾은 나는 가만히 곁으로 다가가 갔다.
“어떻게 대선아...우리 엄마..”
울먹이는 작은 누이의 말과 함께 통로 끝 검사실의 문이 열리며 침상 하나가 밀려 나왔다. 언제나 향긋한 스프레이로 이쁘게 정리되어 있던 엄마의 머리카락이 없어져 있었다. 깨끗이 잘린 머리로 엄마는 깊은 잠에 든 채 침대에 누워 계셨다. 의사의 설명은 동일했다.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이다. 하지만 의사의 과학적 의견을 무시한 채 엄마는 감사하게도 살아나셨다. 그렇게 엄마는 병상에서의 외롭고 격렬한 전쟁 같은 삶을 시작하셨다. 누이들도 누구랄 것 없이 둘 다 헌신적으로 엄마를 간호하고 열심히 생활해 갔다. 큰누이는 만삭의 몸으로 하루하루 중환자실에 머물며 헌신적으로 엄마를 간호했다. 직장을 다니는 작은 누이는 일과 간호를, 그리고 나는 학교와 병원을 오가며 열심히 마음을 다해 노력했다. 삼남매의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엄마는 조금씩 호전되어 반신을 못 쓰셔도 혼자 생활할 정도로 건강을 되찾으시게 되었다.
어렸던 나와 달리 성인이 되어 두 번째로 엄마의 중환자실을 겪는 누이들은 마음이 많이 무거운 듯했다. 얼마나 무서운 병이고 당사자인 엄마가 얼마나 힘드실지 더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연세가 드신 만큼 호전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은 더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왔다.
산 중턱에 있는 병원의 본관 옆에 편의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그곳의 카페는 우리 삼남매의 대기 장소로 활용되었다. 낮에는 시원스럽게 시내의 전경이 내려다 보였고, 해가 지면 야경이 볼만 했다. 입원하고 보름 정도 지났을 무렵 면회 후 의사 면담을 마친 삼남매는 고민에 빠진 채 각자 멍하니 카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의사는 엄마가 다행히 고비를 넘기셨지만 스스로 호흡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목에 수술을 하고 기관 삽입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소견을 삼남매에게 전했다. 20년 전 50세에 쓰러지셨을 당시에는 당연한 듯이 의사 말대로 수술을 했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된 엄마는 목이 아물고 입으로 식사를 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많이 틀려졌다. 삼남매는 의사의 소견에 별다른 의견 없이 알았다고 했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사람에게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엄마의 모습, 그리고 70세의 의식이 없는 엄마가 호흡기에 의지한 채 병상에 누워계실 것을 생각하며 모두 마음이 착잡했다. 그리 희망적이지 않은 현실이기에 삼남매는 수술 일정을 잡아놓고도 마음이 무거워 각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환자들보다 보호자들이 많이 모여있는 병원. 서로서로 가족을 병실에 두고 사연을 공유하게 되는 보호자들은 서로 많은 정보를 공유하곤 했다. 그중에서 가장 의견이 많이 나뉘는 것이 호흡과 식사를 위한 기관 삽입 수술이었다. 예전에야 가족을 살리기 위해 당연히 수술을 했지만 이때쯤에는 보호자들 중에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의견도 많았다. 다른 것이 아닌 특히나 부모님들의 의사였다. 수술을 하는 동시에 병상 생활이 길어지는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이 힘들까 걱정하는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아프기 전 미리 당부해 놓는 경우도 많아졌다. 자식들은 마음 아프지만 수술이 아닌 이별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부모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아닌 병상에서의 고생을 덜어드린다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 삼남매도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엄마와의 시간을 선택했다. 선택이란 말이 힘들다. 삶과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이 아닌 엄마의 삶과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 말이다.
어찌 보면 병상에서의 투쟁을 엄마에게 강요한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수술을 원한 것이 엄마를 위해서 인지, 아니면 엄마와의 시간을 원한 우리를 위해서인지. 정답은 없었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난 후 나의 마음에서는 자식들의 이기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분씩 하루 두 번의 면회 시간. 고요히 누워있는 엄마 곁에서 체온을 느끼고, 얼굴을 쓰다듬고 목소리를 들려드리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누이들도 불안함 속에 느낀 마음은 비슷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은 결국 수술을 선택했다.
“엄마한테 물어보고 결정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막을 깨고 작은 누이가 답답한 듯 입을 열었다. 사춘기 여고생이 엄마에게 투정하 듯 큰누이가 대꾸했다.
“그러게. 목소리도 큰 노인네가 왜 저렇게 조용하시다니..”
깊은 한숨 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엄마 옆에 할아버지는 수술 안 하기로 하셨나 봐. 면회 전에 아드님들 대화에 그렇게 얘기하더라구”
나는 무심결에 생각이나 입을 열었다.
“요즘에는 많이들 그렇게 하더라. 부모님도 자식들도 고생하신다고 말이야.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치 언니?”
“그러게.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아. 그래도 우리 노인네는 다시 일어나시겠지. 보통 강한 분이 아니잖아”
큰누이는 작은 누이의 부름에 애써 대답했다.
정답은 없었다. 각자의 선택이었다. 우리는 수술을 선택했다. 물론 수술을 한다고 회복이 빨라지고 좋아지신다는 보장은 없었다. 엄마와 함께 하고픈 마음뿐이었다. 수술을 잘 마치고 예전처럼 다시 일어서주시길 바랄 뿐이었다. 다음 면회 시간이 되어 만난 엄마에게 수술을 말씀드렸다. 듣고 계신지 어떤지 모를 엄마에게 나는 말씀드렸다. 그리고 한참을 듣고 있던 엄마는 힘겹게 눈을 뜨시더니 나를 지그시 바라보셨다. 어찌 보면 사랑스럽게, 어찌 보면 ‘왜 그랬니?’하고 나무라 듯. 우리의 선택은 어떻게든 마음을 다해 엄마와 함께 하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누구든 이런 선택의 때에 나름의 결정을 하리라 생각한다. 그 선택에 대해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의 모습이 얼마나 커다란 의미가 있는지는 시간이 흘러 느낄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