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다행히 중환자실을 벗어나셨다. 호흡기를 착용하고 공동 간병인이 있는 6인실로 자리를 옮기셨다. 일반 병동으로 이동은 너무나 감사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이겨내신 엄마는 온몸이 병상에 묶힌채 너무나 고생스러울 장기간의 2차전을 묵묵히 시작하셨다. 그리고 엄마에게 덮쳐 온 병마는 20여년간 긴 투쟁 끝에 엄마가 애써 찾으셨던 기억들까지도 침상에 함께 가둬 버렸다. 일반병동으로 오는데 한 달 가까운 시간. 모든 것을 멈춘 채 중환자실을 오가던 우리 삼남매도 장기전을 준비했다. 큰누이는 직장 때문에 주말마다 오가는 생활을, 나는 서울에서 일을 하고 저녁마다 왕복 3시간의 운전을 하며 병원으로의 출퇴근을 시작했다. 매일 저녁 작은 누이와 만나 엄마 얼굴을 보고 화려한 시내 야경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 뒤 귀가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병실에는 6명의 환자가 함께 하고 있었다. 엄마는 문을 들어서면 입구 바로 우측 옆으로 배정되었다. 그 옆으로 엄마보다 10살 이상 연세 드신 할머니 두 분이, 그리고 맞은편 침상 세 곳에는 젊은 여성 두 명과 어린아이 한 명이 자리를 잡고 있다. 병실 중앙 창가에는 작은 냉장고가 있고 그 위에 TV가 놓여 있다. 커다란 병실 창문 덕에 실내는 환했다. 입구 왼쪽에는 화장실이 하나 있고 그 옆으로 간병인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조용한 병실에 소리 없는 TV 화면만 분주히 움직였다. 병실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앞은 간호사실이다.
엄마를 모시고 처음 들어서자 호리호리한 간병인이 다가와 인사하며 필요한 물품들을 알려줬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체격 좋은 엄마를 부탁하려니 미안함과 걱정이 된다.
‘너무 마르고 기운 없어 보이시는데, 대소변이든 체위변경이든 괜찮은 건가?’
체중이 많이 나가는 엄마를 비롯해 전부 여섯 명의 환자를 홀로 챙겨야 하는 간병인의 모습을 보며 걱정이 밀려왔다.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주말에 들리곤 했다. 그만큼 평상시에는 간병인의 손에 모든 것이 돌아가는 형태였다. 어린 환자의 경우만 엄마가 옆에서 챙기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다들 일을 해야 하는 현실에 간병인에 대한 의존도는 높았다. 매일이 잘 짜인 스케줄에 따라 운영되었다. 간병인들은 간단한 세안과 기저귀 교체, 시간대별로 좌우로 체위 변경 등을 해주었다. 간호사들은 정기적으로 혈압과 호흡 상태를 점검했다. 오전 의사들은 문안 인사하 듯 회진을 돌았다. 일반 병동으로 옮기고 의사에게 엄마의 상태를 설명받았지만 손 쓸 것이 없는 상황이라는 말뿐이었다.
병실을 옮기고 첫 주말 삼남매는 점심때쯤 엄마를 찾았다. 면회 시간이 없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잠시 엄마를 뵙고 간호사실로 향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더 나빠지신 것이 없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엄마에게 돌아와 침대를 애워싸고 앉아있는 우리 곁으로 간병인이 다가왔다.
“잘 주무시고 대변도 잘 보고 계세요. 눈도 자주 뜨시구요”
물어보지도 않는 내용을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는 말끝을 흐리며 한 마디 더 했다.
“체중이 많이 나가셔서 체위 하느라 살 좀 빠지겠어요...”
순간 큰누이가 답했다.
“여사님은 원래 날씬하신 것 같은데요!”
톡 쏘며 말하는 누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살아오며 풍파를 많이 겪은 큰누이는 망설임이 없다. 옆에 있던 작은 누이가 소매를 잡으며 간병인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고생 많으실텐데 잘 부탁드릴게요”
큰누이의 말에 멋쩍은 듯 간병인은 서둘러 다른 환자 곁으로 자리를 피했다.
우리들은 조금 무거워진 표정으로 각자 엄마를 부르며 여기저기 정돈해 드렸다. 한 사람은 얼굴을, 한 사람은 손톱 발톱을, 한 사람은 병상 주변을. 공동 간병인 병실은 실내등을 일찍 소등하는 편이었다. 우리는 저녁때가 다가와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각자 엄마에게 얼굴을 비비며 방문 일정을 말씀드렸다. 나오는 길 간병인이 신경 쓰였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병원 매점으로 향했다.
“바카스 두 박스만 주세요”
작은 누이의 주문에 큰누이가 물었다.
“왜 두 박스야?”
“간호사실도 드려야지”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간병인과 간호사실을 찾아 박카스를 전하며 부탁의 마음을 전했다.
석양이 도시에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병원을 나와 인근 식당에 자리 잡았다. 매콤한 낙지볶음이 테이블 중앙에 준비되고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씩 나눠 마신다. 답답함이 가득한 만큼 맥주가 더 시원하게 몸을 적셨다.
“중환자실에서 나오셔서 너무나 좋아했는데 복병이 있었네”
매운 낙지 기운에 땀을 흘리며 나는 말했다.
“그니까. 엄청 신경 쓰인다. 처음 쓰러지셨을 때는 생각도 못했는데 간병인이 제대로 해줄지 말이야”
술잔을 채우며 큰누이가 말했다.
“방법 없잖아. 자주 찾아뵙고 우리가 함께 챙겨드려야지. 내가 퇴근길에 들려서 매일 찾아뵐테니까 둘 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항상 엄마 옆에서 반찬거리에 용돈에 엄마를 제일 많이 챙겨 온 작은 누이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엄마 덕분에 우리 자주 보니 좋긴 하네”
항상 고생하는 작은 누이에 대한 미안함을 뒤로하고 큰누이가 말했다. 큰누이의 말처럼 우리가 모이는 건 1년에 세 번 정도였다. 설날과 추석, 그리고 엄마 생신. 그것도 1박 2일의 일정으로 엄마와 하룻밤씩 같이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20년이라 해도 냉정하게 120일 정도만 엄마와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무슨 이유가 그리 많고 뭐가 그리 바빴는지 짙은 후회가 밀려왔다.
“엄마 덕분이네. 자식들 사이좋게 자주 보라고 누우셨나 보다”
작은 누이가 답했다.
“나는 당분간 매일 내려올 거니까 작은 누이 시간 맞으면 같이 뵙자”
“대선아 너무 무리하지 마. 회사일도 있는데 괜찮겠어?”
“그러고 싶어. 회사일은 노트북 들고 다니며 어떻게든 해야지”
나의 계획에 마음 써주는 작은 누이는 이래저래 걱정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었다. 결혼을 하고도 어떤 이유에서든 엄마를 홀로 지내게 한 나는 그러고 싶었다. 그것이 내 스스로 위안을 삼고 싶어 하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큰누이가 물었다.
“박카스 받으면서 간병인은 뭐라던?”
“좋아하지. 잘 챙겨드릴 테니 걱정 말라고 하시더라고. 뭐라고 더 하시겠어. 겪어보면 알겠지”
“에휴, 남의 손에 엄마를 맡겨야 하니 걱정이 되네. 다른 방법도 없고. 주말마다 엄마 보러 갈 때 박카스라도 계속 챙겨야겠네”
“그러자. 그분도 힘들 텐데 뭐라도 계속 챙겨드리면 좀 낫겠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두 누이들의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엄마가 편히 계시길 바라는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마를 뵈러 갈 때면 항상 손에 비닐봉지가 있게 되었다. 간병인에게 전하는 박카스는 엄마를 위하는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