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철학 박사과정
작성자 성명: 김소영
GPF 분과: 역사철학
GPF 선정연도: 2017년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말 그대로 전세계가 휘청이고 있다. 전례 없는 전염병의 확산은 바이러스 이슈가 단순히 생물학이나 의학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는 생물학의 영역에 속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과 관련된 분야는 정치, 경제, 의료, 등의 실질적인 분야에서부터 문화와 역사와 같이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이차적 관련성을 갖는 분야까지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문제와 관련된 분야가 이렇게나 다종다양하지만, 반대로 코로나 바이러스와 가장 무관한 영역을 꼽으라는 질문에는 아마 많은 이들이 주저없이 철학을 고를 것이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바이러스가 철학과 너무 동떨어진 주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철학이 삶의 의미를 찾는 학문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그러한 이유들은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에 기인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꽤 오랫동안 철학을 해온 사람으로서 (확실성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단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철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철학”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다양한 맥락에서 빈번히 사용된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다. 물론, 그때 마다 “철학”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시대에 따라 그 범위가 많이 달라져왔던 만큼 철학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합의가 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개념에 관한 학문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그 점에 이견을 제기할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철학은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는 모든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철학”이라는 낱말은 단독으로 쓰이기보다 “oo 철학”과 같이 다른 단어와 함께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 “정치 철학”이나 “과학 철학”과 같은 말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전세계적 베스트 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는 명백한 철학서이다. 샌델이 그 책에서 “정의justice”라는 개념을 정의definition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 다루는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1]와 같은 유명한 예시는 “정의”라는 개념을 정식화하는데 있어서 그 개념을 더 정교화할 수 있도록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트롤리 딜레마는 엄밀한 의미로 그 자체가 철학의 문제인 것은 아니지만 철학의 문제를 정교화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철학에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얼핏 보기에 철학과는 무관할 것 같은 바이러스가 철학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덜 익숙한 용어이기는 하지만 생물 철학도 과학 철학의, 더 나아가서는 철학의 한 분과로서 당당히 존재한다. 생물 철학은 물론 생물학과 관련된 개념들을 이해하는데 주력한다. 생물학과 관련된 하나의 중요한 철학적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즉, 생명의 기준은 무엇인가? 생물학은 생물들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데, 여기서 “생물”이란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살아있음”이라는 개념이 생물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저 화학물질에 불과한 어떤 것과 유기체로서 살아있는 것을 구별할 이론적 기반이 있어야 화학의 연구 대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생물학의 연구 대상을 특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음”, 혹은 간단히 “생명”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한 중요한 사례가 바로 바이러스이다. 트롤리 딜레마가 “정의”를 정의하는데 어려움을 제기하듯이, 바이러스는 “생명”을 정의하는데 어려움을 낳게 하는 것이다.
생명에 관한 가장 오래 지속되어 온 철학적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살아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상대적으로) 직접적인 지각적 판단만이 가능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는 현대의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만큼 정확한 요소들을 포함한다. 그는 생명체를 인간, 동물, 식물 군으로 분류하고, 각 군의 생명체가 어떤 조건하에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지를 규정한다. 인간들의 생명 조건은 영양분 섭취와 성장, 지각, 욕구, 사고 등을 포함하고, 동물들은 사고를 제외한 요소들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좁은 의미의 생명체인 식물은 영양분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경우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2]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 개념은 정도를 허용한다고 볼 수 있으며, 바이러스의 경우 당연히 가장 낮은 정도의 생명체인 식물군에 대한 규정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다만 바이러스는 식물보다도 훨씬 더 단순한 물질이고, 특히 대사 작용을 하지 않아서 영양 섭취를 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좀 더 축소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성장하는 능력 정도를 살아있음의 조건으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다. 우리가 식물에 대해서 인간 수준의 살아있음을 생명의 기준으로 삼지 않듯이,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식물 수준의 살아있음을 생명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바이러스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바이러스”라는 단어는 “독”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인 “비루스vīrus”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바이러스는 오랫동안 일종의 독으로 여겨져 왔으며,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저 특정 질병을 유발하는 미시적 운반체정도로만 이해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명백히 생물학적인 작용을 통해서 확산되었기 때문에, 생물학자들은 바이러스를 그저 유전자를 지닌 모든 살아있는 것들 중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라고만 생각했다.[3] 그러나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과학자들은 바이러스를 한 가지 안정된 상태에 있는 단일 생명체로 정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우리가 보통 “바이러스”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가운데 있는 유전자를 단백막이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나 “코로나 바이러스”를 검색하면 나오는 왕관 모양의 이미지[4]는 바이러스가 비활성화된 상태인 비리온virion, 즉 바이러스 입자 상태이다. 비리온 상태의 바이러스는 안정적이고 다른 것들과 구별 가능하며 거의 비활성적이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니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곤 한다.[5] 처음으로 바이러스를 결정화하고, 그것이 복잡한 생화학물질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 과학자인 스탠리Wendell M. Stanley와 그의 동료들이 이 작업으로 1946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했다는 점도 의미심장한 구절이다.[6]
그러나 아주 엄밀하게 고찰하였을 때 비리온은 비활성적인 상태에 있지 않으며, 그것이 숙주 세포와 접촉한 이후에는 비활성적인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진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비리온 상태의 바이러스가 닭이나 돼지, 혹은 사람과 같이 적합한 숙주 세포와 접촉하게 되면, 그것은 즉시 세포 수용체와 상호작용하기 시작하여 세포 내로 들어간다. 그 이후 외피가 벗겨지고 RNA가 세포질로 방출되는데, 숙주 세포의 요소들을 사용하여 단백질 생성과 바이러스 복제가 이루어진다. 이때 바이러스는 성장하는 능력과 자기복제라는 생명체를 정의하는데 중요한 두 속성들을 포함하여 미생물이 갖는 모든 속성을 보여준다.[7] 이 두 속성들은 앞서 본 가장 최소적인 철학적 의미의 살아있음 기준인 성장하는 능력에도 완벽하게 부합한다.
바이러스를 살아있는 것으로 규정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철학적, 생물학적 주제이다. 바이러스가 거의 비활성적인 비리온 상태와 활성적인 상태로 나누어져 어느 한 쪽으로 일치된 합의를 도출하기가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바이러스를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과정[8]으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동시감염 바이러스인 바이로파지virophage의 발견이 바이러스가 살아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9]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든 바이러스가 살아있다는 것을 거부하기는 그다지 쉬운일이 아닌데, 이것은 흔히 알려져있는 상식에 반하는 일이다.[10] 나는 철학이 기여하는 바가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느슨한 이해로 잘못 알려진 것들을 엄밀한 규정을 통해 제대로 알게하는 것 말이다. 이것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에게 철학적 사고가 요구되는 이유가 아닐까!
참고문헌
아리스토텔레스, <영혼론>
약학정보원 학술정보센터, “코로나바이러스의 이해”, Pharm Review
Helen Pearson, “‘Virophage’ Suggests Viruses are Alive”, Nature, Vol. 454, Iss. 7205 (2008)
John Dupre, et al., “Viruses as Living Process”,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Biological and Biomedical Sciences 59 (2016)
Jean-Michel Claverie, et al., “Giant Viruses: The Difficult Breaking of Multiple Epistemological Barriers”,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Biological and Biomedical Sciences 59 (2016)
Luis P. Villarreal, “Are Viruses Alive?”, Scientific American, Vol. 291, No. 6 (2004)
미주
[1] 트롤리 딜레마는 필리파 풋Phillippa Foot이라는 철학자가 제일 처음 제시한 사고실험으로 그 이후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수정, 변형되었다. 열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고 한 쪽엔 한 명의 노동자가, 다른 한 쪽에는 다섯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고, 열차의 방향을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있다. 이때 다섯 명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죽도록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가?
[2] 아리스토텔레스 <영혼론>, 413a 21-b 25
[3] Luis P. Villarreal, “Are Viruses Alive?”, Scientific American, Vol. 291, No. 6 (2004), p. 101
[4] 코로나 바이러스는 표면 돌기 단백질을 구성하는 돌기가 왕관corona모양을 형성하기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명명되었다. 약학정보원 학술정보센터, “코로나바이러스의 이해”, Pharm Review, p. 2
[5] John Dupre, et al., “Viruses as Living Process”,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Biological and Biomedical Sciences 59 (2016), p. 113
[6] Luis P. Villarreal(2004), p. 100
[7] Jean-Michel Claverie, et al., “Giant Viruses: The Difficult Breaking of Multiple Epistemological Barriers”,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Biological and Biomedical Sciences 59 (2016), pp. 92-93
[8] John Dupre, et al. (2016)
[9] Helen Pearson, “‘Virophage’ Suggests Viruses are Alive”, Nature, Vol. 454, Iss. 7205 (2008)
[10] 그러나 식물도 거의 비활성적 상태인 씨앗 상태와 발아 후 활성적인 식물 상태로 나눠지지 않는가? 그럼에도 식물을 생명체로 규정하는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