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May 07. 2019

고래사냥

천명관, 고래

고래사냥     

이제 막 작가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공표(公表)하는 ‘수상 소감’은, 이를테면 옛날 풍습이던 초면 인사 때 자신의 관향(貫鄕)을 밝히는 행위와 유사하다. 요즘 여기저기서 ‘오래된 미래’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옛날 어른들이 즐기던 그 관향을 서로 밝히던 관습이 바로 그 ‘오래된 미래’를 서로 주고받는 절차였다고도 할 수 있다. 신진 작가의 수상 소감은 대체로 그의 소설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를 예고해 주는 ‘오래된 미래’의 언명으로 채워질 때가 많다. 자신의 관향을 밝히는 공개적인 장소인 것이다. 다음 작가 천명관의 수상 소감도 그렇다.     

…나의 할머니는 이제 99세가 되었다. 그분은 압구정동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와 결혼한 뒤엔 공덕동에서 오래 사셨다. 할아버지는 마부들을 고용해 마포나루 일대에서 일종의 운수업을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마차는 아마도 부잣집 마나님들이 까다롭게 고른 새우젓 동이를 문안으로 실어 날랐을 것이다. 할머니는 한때 소위, 마포나루의 새우젓 장사들을 상대로 개장국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평생 서울을 떠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에게 있어선 세상이 문안과 문밖, 둘로 나뉜다. 그 바깥은 잘 모르신다. 

할머니는 세상을 문안과 문밖, 둘로만 구분하듯이 사람의 성격도 단 두 가지로만 구분하신다. 하나는 ‘암상’이고 다른 하나는 ‘심술’이다. 할머니의 지론대로라면 모든 사람은 그 둘 중의 하나에 속해 있다. 그 분은 이에 대해 별다른 설명이 없다. 그저 누구를 가리키며 저애는 암상이고 또 다른 누구는 심술이라는 식이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분은 이렇게 대답한다.

- 글쎄, 보면 모르겠니? 쟤는 심술이라니까.

처음에 나는 그 기준이 뭔지 몰라 혼란스러웠지만 곧 할머니의 구분법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나도 사람들을 그 기준에 의해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구분법에 의하면 할머니와 나는 암상에 속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심술이다. 그 구분의 기준을 구태여 설명하려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할머니의 말대로 그것은 그냥 척 보면 알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친구든 부부든, 주인이든 밑에 두고 부리는 사람이든, 암상과 심술이 서로 짝을 이뤄야 잘 살게 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대개 그렇게 이루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천명관, 「수상소감」, 『문학동네』 41호]     

할머니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두 가지가 유추된다. 첫째는, 작가는 ‘사람마다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무릇 작가는 그런 다양한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가감 없이 묘사하는 자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을 보는 기준은 암상과 심술, 세상을 보는 기준은 문안과 문밖, 그렇게 단순화시킨 채 평생을 살다 가신 할머니가 타고난 구조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내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양한 인간의 삶을 알 의무가 있다’라는 뜻으로 읽힌다. 소설은 결국 ‘타인의 삶을 내 것으로 살아내기’의 일환이므로 적어도 한 작가의 수상 소감이라면 그렇게 읽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둘째는, 세상 모든 것은 그냥 ‘보면 안다’는 것이다. 보고 모를 일은 세상에 없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그는 앞으로 그렇게 소설을 쓰겠다고 말한다. 그냥 척 보면 알 일을, 마치 무엇인가 특별한 궁리를 해서 꽁꽁 숨어있는 것을 억지로 찾아내는 식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서약(誓約)이다. 이미 그런 서약은 오래 전부터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공공연히 공표가 되어 온 것이다.     

“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을 찾지 마라. 현상은 그것 자체가 중요한 교훈이다.” 문호 괴테의 말이다. “세상의 신비는 보이지 않는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속에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야말로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이다.” 수잔 손탁의 말이다. “신념이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D. 데이비슨의 말이다. “글자는 결코 예정대로 종착점에 돌아오지 않는다.” 데리다의 말이다. “인간은 바닷가의 모래 위에 그려진 얼굴처럼 사라질 것이다.” 푸코의 말이다.

괴테의 것까지를 포함한 이 말들은 20세기 후반 서양 철학 사상사의 뱃머리를 치며 흩날리는 포말이거나, 인근의 해안을 범람하는 물결이다. 대체로 그것은 안과 속에 대한 기대와 환상에서 깨어나 겉과 바깥으로 포커스와 악센트를 옮기려는 정신적 태도다. 서양 사상사의 흐름에 잠시라도 코를 담가본 이라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이러한 태도는 물론 그간의 주류 사조에 대한 반동의 냄새가 짙다. [김영민․이왕주, 『소설 속의 철학』]     

서양 사상의 주류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으로부터 데카르트를 거쳐 후설과 융에 이르는 내면성의 철학이 아닌가 싶은데, 이데아의 초월성, 코기토의 자기 명증성, 의식의 지향성, 그리고 무의식의 역사성 등등 현상보다는 ‘본질’에 집착하는 서양사상사의 큰 흐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현상의 배후에 숨어있는 어떤 배후, 아니면 그 깊은 속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동안의 서양사상사의 주류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멜빌의 『백경(白鏡)』 역시 그들이 좋아하는 ‘깊은 속’에 대한 이야기다.     

멜빌의 『백경(白鏡)』은 고래의 겉모습을 묘사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에 대한 흔한 평가에 따르면, 이 흰 고래는 운명이나 신의 외투, 혹은 원초적 자연력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오스카 와일드 식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이 다룬 것은 보이는 고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상징인 셈이다. 그런 뜻에서 보면 『백경(白鏡)』은 괴테-와일드-손탁-데이비슨-데리다-푸코의 생각에 비해 무척 고전적인 풍경을 그리고 있다.

백경에게 한쪽 발을 뜯어먹힌 에이헙 선장은 마치 신에게 도전하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처럼 필경 자신에게 다가올 비극적인 운명을 눈앞에 그리면서도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집요하게 백경을 추적한다. 그는 태양을 질투하며 그리스도교의 경건도 물리치고 마침내 인간성의 흔적조차 지워버리면서, 자신의 운명을 신의 운명과 일치시키려는 듯 미친 듯이 대양을 헤매다닌다. 그러나 백경과 사흘 동안의 사투 끝에 에이헙 선장과 비쿼드 호는 장렬하게 전몰(戰歿)하고, 이슈마엘만이 이 이야기의 구술자로 살아남는다. [김영민․이왕주, 『소설 속의 철학』]     

비쿼드 호의 침몰과 함께 신화적 고래사냥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제 고래는 그냥 고래일 뿐이다. 작가 천명관은 그의 수상 소설 『고래』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쯤 해두자. 진실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그 모든 호들갑은 우리의 주인공 춘희의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졌다. 그녀는 영웅도 아니었고 희생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장인도 아니었으며 숭고한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우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어떤 삶을 원했는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우리와 달랐으며 다르다는 이유로 평생 고독 속에서 살았다. 춘희를 둘러싼 하많은 얘기들은 제 스스로 생명을 얻은 아메바처럼 무한히 확장해가고 있지만 정작 진실은 그 옛날 지상에서 사라진 무림비급처럼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명관, 『고래』]     

멜빌의 고래사냥과 천명관의 고래사냥 사이에서 결국 소설이라는 고래가 헤엄치고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젊은 작가의 소설을 읽은 것은 아마 그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내 고래사냥은 멜빌의 그것을 많이 닮아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나도 진짜 고래를 한 마리 잡고 싶다.

사진은 젊은 날의 한 때, 아직 내 바다에 잡을 고래가 ‘하많다’고 생각하던 시절의 모습.

작가의 이전글 위대한 것의 몰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