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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12. 2019

내 어머니의 남편

뻬드로 빠라모

내 어머니의 남편     

‘어머님이 누구니?’라는 노래가 있답니다. 제목이 좀 당돌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습니다. 박진영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랜데 화면 가득 자극적인 여체(女體)가 전경화 되고 있었습니다. 가사를 보니 “너를 이렇게 잘 키운 어머님이 누구니?”라는 내용입니다. 이 때 ‘잘 키워졌다’는 것은 섹시하게 ‘잘 타고나거나 잘 다듬어진 육체’를 소유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일종의 ‘낮은 물’ 영업 전략의 소산물이었습니다. 이른바 옐로우 멜로디(yellow melody)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바탕에는 춘화(春畵)적 상상력이 깔려있다고 하겠고요. 에로티즘이 상업적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보일 듯 말 듯 금기를 위반하는 변태적 욕망의 출입구 하나를 전면에(제목으로) 배치해서 당돌한 느낌을 주어 독자(청자)들의 관심을 촉발시키고자 했습니다.     

본디 ‘어머니’와 ‘에로티즘’은 상극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개념’과 ‘현실’은 겉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란색 산업’이 그 틈을 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낮은 물 산업’ 종사자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높은 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종종 ‘개념’과 ‘현실’의 간극을 주시합니다. ‘틈’을 노리는 것은 언제나 예술가들의 최우선 관심사였습니다. 성공한 예술작품의 태반은 그 ‘틈’을 예리하게 파고든 결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헤밍웨이의『노인과 바다』나 우리의 『심청가』와 같은 불후의 고전들이 파고든 ‘틈’은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비극적인, 온통 허전하기만 한, 무엇으로 채우지 않으면 끝내 빈 것인, 인간의 삶을 ‘개념’으로부터 구해내고자 하는 피나는 노력의 결정체들이었습니다. 오늘 손에 잡힌 소설도 그럴 것이라고 예단해 봅니다. 첫 줄부터 “어머님이 누구니?”라고 묻습니다.  

   

...꼬말라에 왔다. 이곳은 내 어머니의 남편 뻬드로 빠라모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마을이다. 내가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가겠다는 뜻으로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아드리자, 당신은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이렇게 말했다. “꼭 찾아가야 한다. 그 양반도 너를 보면 좋아할 게다.” 나는 이미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당신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두 손을 빼낸 후에도 한참 동안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생전에 귀가 닳도록 되뇌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

-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요구해라. 그 인간은 나에게 당연히 갚아야 할 것을 하나도 갚지 않았어. 얘야, 그런 인간은 우리를 버렸던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돼.

- 알았어요, 어머니.

그러나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느닷없이 안겨 드는 졸음과 환영 속으로 빠져 드는 이 순간까지. 나는 내 어머니의 남편인 뻬드로 빠라모라는 사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꼬말라에 왔다. [후안 룰포, 정창 옮김, 『뻬드로 빠라모』, 세계문학전집93, 민음사, 2004(3쇄), 7~8쪽]   

  

‘꼬말라’는 어머니의 고향이었습니다. 번역자가 책 말미에 달아놓은 주석에 따르면 ‘타는 듯이 뜨거운 곳’을 뜻한답니다. 소설은 멕시코 서남부 지역을 그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뻬드로 빠라모(Pedro Páramo)’라는 사람 이름에서 ‘뻬드로’는 신약 성경의 베드로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리고, ‘빠라모’는 사전적인 정의로는 척박한 땅, 즉 ‘황무지’를 의미합니다. 황무지의 베드로라는 뜻입니다. 이 소설의 다른 인명, 지명들처럼 이 이름 역시 상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아마 어떤 ‘집단적 무의식’의 소산일지도 모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을 만들고 억압해 온 그 어떤 원초적인 것들 중 하나일 공산이 큽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무언가 직설적으로 말하기 힘든(어려운) 어떤 내용들을 말하고자 함이 분명합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오늘은 화자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서만 간단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소설이 서두에서 던진 화두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버렸던 인간’인 아버지와 살아생전에는 원망 가득한 악담만 퍼붓다가 마지막 순간에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생전에는 그녀의 남편(아버지)을 찾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가 급하게 생각을 바꾼 화자가 일단 우리의 궁금증을 자극합니다. 소설은 어떻게 하든 독자의 궁금증을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시작 부분에서 독자를 사로잡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이 소설은 그 원칙을 잘 지키고 있군요. 이제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와 매혹적인 언어로 독자의 시선을 책 안에 가두는 일만 남았습니다.     


...푹푹 찌는 날씨였다. 8월의 불볕 아래 비누풀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길은 가느냐 오느냐에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게 되어 있어. 다시 말해 가는 사람은 올라가게 되고, 오는 사람은 내려가게 되는 거지.” 

- 저 아래 보이는 마을 이름이 뭡니까?

- 꼬말라요.

- 저 마을이 정말 꼬말라인가요?

- 그렇소.

- 그런데 왜 저렇게 쓸쓸해 보이죠?

- 계절 탓이오.

나는 어머니가 되뇌던 추억과 향수를 통해 꼬말라를 떠올리고 있었다. 평생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면서도 끝내 돌아가지 않았던 당신의 고향, 그곳으로 내가 가고 있다. 당신의 눈빛에 담긴 꼬말라의 정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꼴리모떼스 고개를 넘다 보면, 푸른 벌판과 군데군데 누렇게 익은 옥수숫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지는데, 거기서 꼬말라가 보이는 거야. 밤이면 희뿌연 빛에 휩싸이는…….” 들릴 듯 말 듯, 마치 당신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듯한 고적한 음성……. 아, 어머니.[후안 룰포, 정창 옮김, 『뻬드로 빠라모』, 세계문학전집93, 민음사, 2004(3쇄), 8쪽]     


고갯길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습니다. 가는 사람에게는 힘든 길이고 오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길이 된다는 것, 그것 위에서 내려다보는 고향의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는 것이 그 요지입니다. 어머니는 내 삶의 고향이니 어머니의 고향이 아들에게 특별히 각별한 것은 아무런 의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개념’은 ‘현실’ 앞에서 누추한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애써 그 ‘틈’을 계절의 탓으로 돌리지만 ‘쓸쓸한’ 아들의 심정은 감출 길이 없군요. 어머니가 고향을 찾지 않았던 이유도 어쩌면 그 ‘틈’ 때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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