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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y 16. 2019

사랑하는 법

권여선, 사랑을 믿다

사랑하는 법 

- 권여선, 「사랑을 믿다」


고등학교 때, 『데미안』, 『싯타르타』와 같은 헤르만 헤쎄의 소설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방황의 시간을 좀 줄일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소설이란 것이 이토록 위대하구나라고 처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집아이가 중학 1년 때 이순원의 『19세』를 읽고 - 국어선생님이 권해서 읽었다고 했습니다- 저에게 “(소설이) 대단하던데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기분이 참 좋았던 것도 제게 그런 경험이 있어서였습니다). 저의 작은 고민거리(그때는 컸던)들이 그 안의 내용들을 통해 많이 숙지거나 해소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 소설의 효용에 대해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의 침식작용이 그때의 구체적인 것들, 느낌들, 생각들을 다 데려갔습니다만 그 감동의 강도와 여파(餘波)에 대한 기억은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그 무렵 헤쎄의 어느 책에서 읽은 것인지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어떤 여자 아이든 한 시간만 자세히 보렴, 그러면 넌 그 애를 사랑할 수 있을 거야.”라고 아들 친구에게 전해주는 한 어머니의 애정 어린 충고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으니 분명 그랬습니다. 아마 그 부분도 당시의 제 고민 중의 하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말씀이 심금을 크게 울렸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는 ‘한 시간 자세히 보기’가 마치 저의 연애 좌우명처럼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한 시간은 자세히 그(그녀)의 얼굴을 살폈습니다. 그(그녀)의 표정 하나하나가 제게 던지는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말씀’이 허투루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매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이 어쩌면 제게는 한 작은 ‘아프락시스(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시스다)’였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진득하게 상대의 얼굴을 보게 되면서 두 가지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됩니다. 피부색이나 이목구비의 조화보다는 눈과 표정이 주는 호소력이 더 강한 매혹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단 그렇게 마음이 쏠리게 되면 단점이라고 속단했던 얼굴의 모든 것들이 시야에서 급(急) 사라지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한 번은 눈 밑에 큰 반점이 있던 여자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주 크게 느껴졌는데 예의 그 ‘한 시간 룰’을 지킨 연후에는 점점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제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제 눈에 콩깍지가 씌였던 것입니다. ‘콩깍지’를 확인한 뒤로는 그 소녀 이외의 다른 여자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렇습니다. 살아보니 그렇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은 가급적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자세히 오랫동안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다면 당근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일 ‘한 시간 자세히 보기’의 결과에 순응하지 않고 속된 이해타산 끝에 발걸음을 돌리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가 남게 되어 있습니다(「사랑을 믿다」라는 소설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 그녀는 못생긴 편도, 매력이 없는 편도 아니었다. 내 어법이 이렇게 졸렬하고 인색하다. 누군가가 아름답다든가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일이 나로서는 쉽지가 않다. 대상이 아름답다거나 매력적이라고 긍정하는 순간, 불현듯 그 규정의 한 모서리가 대상과 어긋나는 듯한 불편함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리하여 대상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대신,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라든지 매력적이지 않은 건 아니라든지 하는 조잡한 이중부정을 각주처럼 달아놓고서야 마음이 편해지는 식이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첫인상은 평범했지만 콧날 끝에서 윗입술에 이르는 인중선이 깍은 듯 단정해 과녁처럼 시선의 포인트가 잡혔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그녀의 윗입술의 움직임에, 다시 말해 그녀의 말에 집중하게 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막연히 예쁜 얼굴보다 여러모로 유리한 얼굴이라 할 수도 있었다. 키는 중간 정도에 날씬한 편이었다. 몸매처럼 성격도 기름기가 없이 박하처럼 싸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녀는 머리가 나쁘지도 않았고 몸이 게으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재빠르다는 느낌을 줄 만큼은 아니었는데, 마치 암컷 영양처럼 우아하게 민첩하고 영리할 따름이었다. [권여선, 「사랑을 믿다」, 2008 이상문학상 작품집, 13~14쪽]


위의 인용 글을 보면 화자가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의 눈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인중선의 비율이나 윗입술의 움직임 같은 것이 묘사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짐작합니다. 그런 눈썰미는 일반적으로 ‘시력 좋은’ 여성들의 소관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남성 화자로 등장합니다만(이 소설은 화자가 교체됩니다) 작가가 여성이니 그런 복합적 양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묘사의 내용이 꽤나 볼만합니다. 상대의 눈(눈의 느낌)에 대한 평가가 빠져 있어서 좀 불만이기는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상대방에 대해서 최선의 관찰을 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는 상대의 외모에 대해서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암컷 영양처럼 우아하고 민첩한’ 여자였다는 데에는 더 이상 보탤 말이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그런 모습으로 각인되었다는 것은 여자 역시 남자에게 최선(여자로서 할 수 있는!)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짖지 않는 사나운 암캐처럼’, ‘식탐을 애서 감추고 있는 살찐 암퇘지처럼’, ‘건방지고 게으른 암코양이처럼’ 등과 같은 비유와 비교해 보면 더 쉽게 ‘암컷 영양처럼 우아하고 민첩한’이라는 수사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고의 찬사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조차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애꿎게 엉뚱한 여자에게 공을 들이다가 실연을 당합니다(보기 좋게?). 삼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종로에서 뺨 맞고’ 돌아온 그를 앞에 두고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우아한 암컷 영양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언젠가 실연을 당한 자기 친구에게 했던 이야기라고 둘러대면서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 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 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위의 책, 23쪽]


‘초라하고 하찮은 것들’에 대해서, 그러나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한 번 집중해 보라는 충고합니다. 그것들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내 안을 조금 비워야 한다는 걸 알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걸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 기울여주라’고 표현(권고)합니다. 그러면, 그런 굴욕적인 권고를 받아야 하는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요? 지금은 번듯한(작중 설명은 좀 꾀죄죄한 건물로 되어 있습니다만) 3층 건물의 상속자가 되어 나타난 이 여인의 3년 전 그 ‘초라하고 하찮은 모습’이 싫어서 그녀 곁을 떠났던 이 인물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요?


  나는 그녀와 이십대 후반을 함께 보냈다. 자주 만날 때는 일주일에 두어 번, 드물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만나는 사이였다. 딱히 약속을 정해서 만난 기억은 없었다.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오다가다 부딪치고 얽히게 되었고 취향이나 스타일이 비슷해 각별한 친밀감을 느꼈다. 우리의 만남이 끊어진 건 그녀가 업무를 바꾸면서부터였다. 마침 그때 나도 막 연애에 돌입한 시점이라 그녀에게 따로 연락을 하게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경제관념이 생긴 것, 자기 입맛 위주로 음식을 시키는 것, 이런 것이 그녀가 변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차림새로 보아 그녀가 예전보다 수수해졌다는 건 분명했다. 예전엔 목걸이나 반지는 몰라도 귀걸이 하나는 독특한 걸로 달고 다니길 즐겼는데 그날은 아무 금붙이도 달거나 걸고 있지 않았다. 나는 경제관념이 가난에서 온다는 편견을 따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기 입맛 위주로 음식을 시키는 것, 이 대목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다. 별안간 미식가가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줄어든 탓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경우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기회가 왔을 때 입맛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입에 맞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지낸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이럴 경우, 이것은 그녀에게 생긴 놀라운 경제관념과 더불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녀가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대단히 가난해졌다는 뜻 아니겠는가. 우리가 못 보고 지낸 삼 년 동안에. [위의 책, 17쪽]


오랜만에 만난 옛 여자친구가 2만 원짜리 안주 두 개를 반반씩 섞어서 2만5천원에 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주인장과의 능숙한 거래를 통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묻지 않고 메뉴를 정했다는 것을 두고 펼치는 일련의,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동반한, ‘초라하고 하찮은 상념의 파노라마’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삼단논법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입맛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입에 맞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지낸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라는 부분이 그런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삼단논법’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작가가 오랫동안 관찰해 온, 생각은 많고, 가오도 있으나, 돈이 없는 딱한 존재들의 일상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딱하게 살고 있으니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대단히 가난해진’ 것으로 여겨지는 옛 여자 친구에게 그런 ‘기초적인 사항’에 대한 권고나 받고 있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요. 저러다가는 평생 혼자 살아야 될 운명을 감내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계기(계시?)가 있어서 ‘밑이 확하고 빠지는 경험’을 한 번 겪어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남자 구실을 한 번도 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작 볼 것은 보지 못하고, 그저 차일피일 자기 안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사는,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는 연약하고 무지한 작은 새’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자에게, ‘아프락시스’를 통한, ‘존재의 합일’을 이루게 하는 사랑이 찾아올 수가 없겠지요. 제게는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라는 소설이 그렇게 『데미안』의 후속편으로 읽혔습니다.


사족 한마디.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라는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옛날 기억들이 저절로 스멀스멀 기어나오도록 하는군요. 거의 절반 이상이 기시감을 주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불만도 전혀 없지 않습니다. 무언가 불화(不和)하는 것들이 작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연이 아닌 인공인 소설 안에서는 ‘의도적으로 방치되는’ 것들이 아니면 꼼꼼하게 손을 봐야 합니다. 그야말로 ‘암컷 영양’처럼 우아하고 민첩하게 굴어야 하는 게 작가 아니겠습니까? 이 소설이 우정 사용하고 있는 복수 화자(교체 진술)도 제게는 그렇게 ‘우아하고 민첩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큰고모부님 댁에서의 ‘점집 이야기’도 다른 내용들과 잘 섞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혼자서 겉도는 느낌이었고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냥 ‘초라하고 하찮아서’ 무시해도 좋지 싶습니다. ‘암컷 영양처럼 우아하고 민첩한’ 소설만 좋아하는 저의 오래된 오해와 편견이 만들어낸 ‘가난한 생각’일 뿐일 테니까요.  

<2013. 5. 16. 금일 자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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