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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05. 2019

너는 너무 애쓰지 마라

수준과 종류

너는 너무 애쓰지 마라     

스승과 제자의 문답을 엮어놓은 책이 『논어』다. 문답 내용 중에는 인간됨의 경지를 밝히는 내용이 가장 많다. 그 중에서도 공자와 자공과의 대화, 공자와 자로와의 대화, 공자와 안회와의 대화가 특히 유명하다. 오늘 아침 조간신문에서 공자와 자공과의 대화 일편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 마침 필자가 직장 동료여서 살갑게 읽혔다.     

...자공이 말했다. “저는 남이 나에게 가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사(賜)야, 그것은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사는 자공의 이름이다. 공자의 제자 중 자공은 매우 열성적인 제자였다. 머리도 좋았다. 공자는 여러 차례 자공을 칭찬하고 함께 시와 예를 논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그런 자공이 남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겠다고 하자 공자가 그의 기를 꺾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자공의 기를 꺾는 말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 전에 공자는 자공을 불러 스스로를 안회와 비교해 보라고 하였다. 자공은 자신은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聞一知二) 정도이지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聞一知十) 경지라 감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자공의 대답에 공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너는 안회만 못하다”고 하였던 것이다. 자공은 이러한 스승의 지적이 자신의 능력만 믿고 너무 앞서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교육적 처사라고 인정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공자가 한 말은 자공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공자는 자공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정재걸, 영남일보,2017.6.5.)    

 

교육학자인 필자는 공자가 자공에게 좌절을 안긴 것이 필요 이상의 공부를 자제시키기 위한 것이라 설명한다. “너무 애쓰지 마라”가 스승이 제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만 다 하기에도 벅찬 것이 인생인데 할 수 없는 일까지 이것저것 손을 대다가는 인생을 낭비할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에서였다는 설명이다.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이다. 공부 안 하는 것도 고질이지만 지나친 공부도 백해무익한 일이다. 내 자식 남의 자식 가릴 것 없이 자신의 처지나 능력을 고려치 않고 무작정 공부에 매달리는 것은 말려야 할 일이다.      

공자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지만 공자의 말씀은 모든 것을 ‘일이관지(一以貫之, 한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음)’한다. 그러나 소설가인 나로서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개별적인 발화로 느껴진다. 자공에게 공자가 한 말은 자공에게만 유효한 것이고 자로에게 한 말은 자로에게만 유효한 것일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거기에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싶다. 공자가 자공에게 하고 싶었던 또 하나의 권유는 “너는 너무 애쓰지 마라”였다. 자공에게만 한정된 충고였다. 안회는 안회대로, 자로는 자로대로, 자공은 자공대로 다 쓰임이 다른 인재였다. 공자는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반드시 그 소용(所用)이 있다”라고 믿은 사람이었다.     


그가 드는 예화들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논어가 소개하는 공자와 자공과의 대화는 일관해서 “너는 너무 애쓰지 마라”였다. 똑똑하고 유능하지만 너는 네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인용된 부분에서도 자공은 ‘문일지이와 문일지십’의 비유를 사용했다. 안회와 자신의 차이를 그렇게 정량화했다. 그러나 스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와 너는 안회만 못하다”라고 자신까지 비교의 대상에 포함시켜 수준의 차이를 말하는 자공의 생각을 일견 두둔하면서 정량화할 수 없는 그 어떤 ‘차이’를 강조했다.     

공자는 안회와 관련되어서는 늘 정도(degree)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kind)의 차이를 설(說)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자공의 기를 꺾은 것은 단순히 “너무 애쓰지 마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회와 자공의 차이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만큼 안회의 ‘인간됨의 경지’가 탁월했던 것이다. 안회가 있으므로 해서 공자 자신의 말이 허언(虛言)이나 관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는 차원이라고나 할까? 그에 비교될 때 자공은 한갓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용도에 사용되는 것이라도 안회처럼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의 경지에는 들 수 없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도대체 공부의 지남(指南)이 되는 ‘인간됨의 경지’란 무엇일까? 예수가 말한 “원수를 사랑하라”일까? 아니면 나를 잊고 자연에 스며드는 물아일체 무념무상의 경지일까? 그것도 아니면 손 놓고 사는(흐름에 거역하지 않는) 무위자연일까? 혹시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이 강조한 앙가쥬망일까? 머리에서 손으로 내려오는 게 항상 어려운 나로서는 종잡기가 쉽지 않다. 아침부터 애쓰지 않아도 될 일에 너무 매달리는 것 같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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