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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15. 2019

질투하는 자의 운명

변신이야기

질투하는 자의 운명   

  

흔히들 질투를 여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남자의 질투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여자의 질투는 사사로운 복수와 훼방에 그칠 때가 많지만 남자의 그것은 한 인간의 운명을 뒤흔들 만큼 그 파장이 큽니다. 심지어는 나라의 존망에까지 그 해악이 미칩니다.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 법인데, 스스로 앞을 찾아 나아가지 못하고 앉은자리에서 남의 앞섬만을 시샘하는 자들이 주로 질투의 화신이 됩니다. 그런 자들이 언감생심 뜻을 크게 가지면 작게는 조직이, 크게는 나라가 망합니다. 이른바 질투의 화신들의 속사정을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인비디아(질투의 여신)의 안색은 창백했고 몸은 형편없이 말라 있었다. 게다가 인비디아는 지독한 사팔뜨기였다. 이빨은 변색된 데다 군데군데 썩어 있었고,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이 인비디아의 입술에 미소가 감돌게 할 수 있는 것은 남이 고통 받는 광경뿐이었다. 인비디아는 잠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밤이고 낮이고 근심 걱정에 쫓기고, 남의 좋은 꼴을 보면 속이 상하여 보는 것만으로도 나날이 여위어가는 것이 인비디아였다. 남을 고통스럽게 하면 하는 대로, 자신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저 자신만 녹아나는 게 바로 이 인비디아였다.[오비디우스, 이윤기 옮김, 『변신이야기1』, 민음사, 2000(4쇄), 105쪽]     


질투의 여신 인비디아는 자신의 희생물에게 ‘실제보다 훨씬 화려하게 빚은’ 환영을 보여주어서 질투의 불길을 솟구치게 만듭니다. 한 번 질투의 불길이 솟게 되면 그 다음은 오로지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질투가 사람을 파멸시키는 방법은 그를 돌로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아글라우로스(인비디아는 그녀에게 언니를 질투하도록 독을 넣는다)는 언니의 방문 앞에 드러누워 메르쿠리우스가 언니의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로 했다. <중략> 아글라우로스는 다시 한 번 일어나 보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 무릎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글라우로스가, 온 몸을 지나 손가락 끝까지 퍼져나가는 한기를 느끼고 있을 동안 혈관에서는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갔다. <질투>가 옮긴 괴질은 빠른 속도로 이미 병든 곳과 성한 곳을 파괴했다. 이어서 생명의 숨결이 지나다니는 길을 거슬러 치명적인 냉기가 올라왔다. 아글라우노스는 말을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애썼다고 하더라도 소리는 제 길을 찾아 올라오지 못했으리라. 곧 목이 석화(石化)했고 이어서 입술이 굳어졌다. 아글라우로스는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실은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석상이 되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석상이 되었는데도 돌의 색깔은 거무튀튀했다. 검은 마음의 물이 들어 그런 색깔로 변하게 된 것이다. [오비디우스, 이윤기 옮김, 『변신이야기1』, 민음사, 2000(4쇄), 107~108쪽]     


‘거무튀튀한 석상’으로 변한 마음처럼 슬픈 것도 없을 겁니다. ‘환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은 지옥에 다름 아닙니다. 지나고 보면 그것이 정말이지 부질없는 질투심에서 비롯된 ‘어이없는 슬픔’이었음을 알게 되기에 더 슬픕니다. 사람이 그렇게 조악한 부품으로 조립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를 더 슬프게 합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인간적인 것’으로 봐 줄 수 있습니다. 끝없이, 시도 때도 없이, ‘질투는 나의 힘’으로 여기는 자들을 종종 봅니다. 그들은 아직 석화될 몸이 남아 있어 질투의 여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이미 냉혈(冷血)로 태어나 인비디아의 독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남 잘난 모습은 죽어도 봐 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신조이자 행동강령입니다. 남 잘 하는 일에 재를 뿌리고, 물을 타고, 엇박자를 내고, 앞 서서 가는 사람을 모함하는 일이 그들이 하는 일입니다. 싸이코패스니 소시오패스니, 경계성 성격 장애니 이런저런 부적응자들의 정의(定義)가 넘쳐나도 스스로는 전혀 자기 일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설혹 그런 말들이 자기 주변에서 떠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아예 괘념치 않습니다. 자기 자신과 관련된 괴로움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괴로움 자체를 운명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끝없이 그 괴로움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이시킵니다. 그러니 ‘어이없는 슬픔’에 대한 슬픔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2015. 6. 15.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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