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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n 29. 2019

고양이와 고래

동물 상징

 고양이에 관한 두 편의 글 

   

1.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과 고양이 싫어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유미주의자와 실용주의자의 차이쯤 될까요? 고양이를 싫어하는(사실은 동물 키우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아내와 한평생을 같이 살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한 번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유미주의자고 아내는 실용주의자라는 것이죠. 한 번은 또 나르시시즘을 기준 삼아서 고양이 애호와 혐오를 나누어보기도 했습니다. 나르시시즘이 강한 이들이 고양이를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이 고양이를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습니다. 고양이를 가운데 두고 그렇게 사람을 나누는 것이 올바르고 마땅한 일이 아니라는 자각은 금방 들었습니다. 고양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드러난 하나의 취향이나 태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두 개의 부류로 나누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라는 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이 들면 사람이 그렇게 단순하게 분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고양이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고양이 입으로(고양이 입을 빌려) 무슨 말이든 (고양이와 인간에 관해) 한 번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런 우화적 글쓰기에 대한 욕심은 소설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살아생전에 한 번은 내 글 속에서 ‘만지고 싶은’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역부족으로 그 글 욕심을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고양이를 키우며 일 없이 ‘투사(projection,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이나 생각을 외부 세계로 옮겨놓는 정신 과정)’를 일삼는 한 불안한 청춘의 심리상태를 거칠게 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고양이 키우기>(1987, 고려원)라는 중편소설이 그것입니다. 며칠 전, 후배 작가의 고양이 소설을 한 편 만났을 때 문득 옛날의 그 글 욕심이 떠올랐습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허투루 읽지 않고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황정은 작가의 「묘씨생(猫氏生)」은 정공법적으로, 고양이 화자를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반갑고 대견스러운데 표현 하나하나가 모두 진국입니다. 진짜 고양이가 말하는 것처럼 공들여 썼습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고양이가 자신의 최후 심정을 담담하게 피력하는 다음의 한 문장입니다. “시력도 거의 사라졌다. 바닥에 바짝 닿은 턱을 통해 흙냄새를 맡는다.” 고양이의 최후 심정을 ‘흙냄새’라는 한 단어 속에 압축해 놓은 이 묘사 대목이 참 좋았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마치 저의 마지막 순간을 거기서 만난 듯했습니다. 그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제 시력도 소진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감각인 내 후각이 이 지상에서 흡입할 냄새는 과연 무엇일까? 그런 생각마저 들게 했습니다. 소설 속 고양이는 얼굴을 땅바닥에 누이고 흙냄새를 맡습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감각 활동입니다. 그러면서 “간신히 생각을 이어가고 있”다고 전합니다. 그 ‘이어가는 생각’이 아마 이 소설의 내용일 것 같습니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그렇게 재미있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본디 이런 역관찰자(逆觀察者) 혹은 의인화(擬人化) 주인공 시점은 ‘함축된 저자’를 본격적으로 풍자해야 제대로 재미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법입니다. 고양이를 통해서 ‘나’를 고발하게 하는 것이지요. 아마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가 그런 소설이지 싶습니다. 물론, 적당량의 ‘고양이 세태 묘사’를 그 디테일의 깊이가 인정되도록 면밀히 행하고, 그 가운데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통찰’을 몇 마디 던지는 것이 필수적이겠지요. 그래야 ‘고양이 소설’이 되니까요. 그러나 승부는 역시 ‘자아비판’의 진정성에서 나는 것이지요. 어디까지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 ‘자기부정’ 없이, 여기저기 고양이가 옮겨 다니는 곳을 따라다니며 카메라 시점으로 일관하면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우화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황정은 작가의 「猫氏生」은 그런 면에서 저 같은 ‘늙은 말’들이 보기에는 조금 아쉬운 대목이 있는 소설입니다. 한 번 더 ‘만져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훌쩍 뛰어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서두의 한 줄, “바닥에 바짝 닿은 턱을 통해 흙냄새를 맡는다.”와 중반의 다음과 같은 묘사 장면은 우리의 그런 기대가 전혀 근거 없는 기대가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이 작가의 앞날이 무척 밝다는 느낌을 주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 어떤 전망이나 경치라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만 발생하는 고유한 것이고 보니 단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몸에게도 그런 자리가 있었다. 쥐라거나 남은 밥이라거나 뭐든 먹고 배가 부르면 편안한 자리에서 발을 핥고 곡씨 노인의 방으로 갔다. 어린 몸이었던 시절이 지나간 뒤로 노인은 나를 특별히 보살피지 않았다. 애완동물과 사육자라는 관계는 이미 아니었다. 다만 칠이 벗겨진 문고리를 향해 묘오묘오 부르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 방의 궤짝과 선반을 순서대로 밟아서 창으로 올라갔다. 창이라고 부르기도 묘한 것이 본래는 창이 없던 방에 통풍구를 내려고 천장 가까운 곳에 투박하게 뚫어둔 사각 틈에 불과했다. 곡씨 노인은 겨울이라서 바깥이 몹시 추울 때를 제외하고는 그 구멍을 열린 채로 놓아두었다. 창 바깥은 낭떠러지처럼 지상을 향해 깊이 떨어지는 외벽이었다. 높고 좁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인간들이 어디론가 이동하며 만들어내는 불빛 띠들을 바라보았다. <중략> 바깥에서도 그런 경치쯤 볼 수 있는 탁 트인 곳이 얼마든지 있었으나 그 자리가 좋았다. 해 지고 난 뒤엔 그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았다. 이따금 노인이 몸을 뒤집는 기척에 눈을 떠보면 그 조그만 방이 마치 천년은 묵은 것처럼 어둡고 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꼬리로 벽을 쓸어보고는 하다가 잠들었다. [황정은, 「猫氏生」, 2011년 이상문학상 수상집, 275쪽]     


‘전망(展望)’은 멀리 내다보이는 경치를 뜻합니다. 특정 전망이 특별한 감정을 불러내는 것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매 한 가지일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도 중하지만, 좋은 느낌을 주는 특별한 ‘전망’들을 남부럽지 않게 소유하는 것도 꽤나 소중한 일일 것입니다. 인용문에서처럼 고양이가 다른 ‘탁 트인 곳’보다도 ‘지상을 향해 깊이 떨어지는 외벽’을 바깥으로 둔 ‘통풍구’를 유난히 더 사랑했던 까닭은 그것이 바로 ‘곡씨 노인’의 방에 난 창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인은 첫 생애에서(주인공 고양이는 몇 번의 환생을 경험합니다) 죽음의 문턱에 놓여있던 고양이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따듯한 체온을 옮겨준 당사자였습니다. 그 삶의 온기를 배경으로 고양이는 각박한 인간 세상을 내려다봅니다. 그러니, ‘전망’이란 것이 꼭 ‘멀리 내다보이는 경치’인 것만도 아니겠습니다. 누구와 함께, 어디에서, 언제 보느냐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내게 ‘전망’이 몇 개나 있는지가 급 궁금해집니다. 거기에 관해서 따로 한 편의 글을 써 보고 싶습니다. ‘전망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요. 어쨌든, 높은 곳에 앉아서 꼬리로 내 방 벽을 쓸어보다가 잠들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 키우고 싶습니다.   

  

2. 아주 오래 전, 『고양이 키우기』라는 소설을 지역 신문에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작가 중편 릴레이’라는 기획 연재 행사의 일환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신문에 연재하는 소설 고료가 큰 수입원이 되던 때였습니다. 제법 정성을 들여서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면서 느낀 소회들을 또박또박 적었습니다. 물론 고양이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였습니다. 소설가는 무엇을 적든 자기 이야기를 할 뿐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으니까요. 그것을 본 한 직장 동료가 제게 말했습니다. “고양이 좀 그만 잡아라.”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차마 읽기가 징하다는 거였습니다. 아마 고양이에 투사된 제 콤플렉스들이 그런 독자의 항의를 불러내는 것이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읽기가 불편하다는 게 그 요지였습니다. 


미셸투르니에의 『외면일기』에도 고양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는 그런 불편함이 없습니다. 보기 좋은 동병상련만 있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이 ‘키우는 것들’은 키우는 자의 기대와 배려를 제 몸으로 구현해 냅니다. 그것들은 기대한 만큼만 자랍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여러 마리의 가축들 가운데서 생겨난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소설가 이브 나바르에게 갖다 주었더니 그는 고양이에게 ‘티포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내 소설 『마왕』의 주인공 이름이다. 6개월 뒤 그 집에 찾아갔다 와서 나는 그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 “티포주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네. 정말이지 내가 자네에게 갖다 주었을 때는 그저 평범할 뿐이었던 그 고양이가 자네의 열성적인 배려 덕분에 보기 드문 짐승, 요컨대 예외적인 사내가 되었네 그려. 그 녀석에게는 내가 동물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활기, 젊음, 광채, 자신감이 넘치고 있어. 그 녀석이 때로 감당 못하게 군다 해도 그것은 바로 어떤 공허감을 메우기 위하여 자네가 그 녀석에게 기대하는 바에 꼭 맞는 만큼만 그러는 것일세.”그런 말을 적어 보내자니 우리 집 정원에서 괴물처럼 엄청난 덩치로 자라버린 코카서스 산 어수리나무를 보고 어떤 여자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니까 그렇죠. 이 나무가 그걸 아는 거예요.”

나중에 이브 나바르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자네는 내게 티포주를 줌으로써 내게 큰 도움을 주었네. 그러나 자네는 나한테 공쿠르 상을 줌으로써 나를 속속들이 망쳐놓았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자살에는 전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믿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30쪽]     


동물이나 식물이 주인의 마음을 읽고 그에 따른 성장을 하고, 기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이브 나바르가 제가 ‘고양이 키우기’를 썼던 바로 그 시간에 ‘고양이 이야기(한 고양이의 생애)’를 썼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이 책을 서점에서 찾지 못했다면 그 사실도 영원히 저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책을 번역해서 저 같은 시골무사에게도 프랑스 소설가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번역자(김화영)가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앞 장에서는 고래 이야기를 이번에는 고양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설은 고래사냥 아니면 고양이 키우기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소설가들은 둘 중의 하나를 글로 씁니다. ‘겁나 커서’, 한 마리 잡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큰 동물 잡는 이야기거나 아니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 기르기 힘든’ 작은 동물 키우는 이야기거나, 둘 중의 하나를 그들은 씁니다. 이야기 거리가 무궁무진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설이라는 게 결국은 그 둘 중의 하나입니다. 상식과 윤리의 허를 찌르는 재미지고 숙연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삶의 목표나 인간 실존의 한계를 두루, 혹은 요모조모 꼼꼼히, 점검하는 게 주로 소설가들이 하는 일입니다. 오래 전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을 대할 때(요즘은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봅니다만) 그 기준에서 작품성 유무를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최근에 큰 상을 받은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두고도 ‘고래사냥’이냐 ‘고양이 키우기’냐를 두고 약간의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보는 이의 관점이나 취향에 따라서 호불호가 확연하게 갈리는 것 같았습니다.


고래와 고양이는 상징 동물입니다. 그만한 상징 동물도 흔치 않습니다. 인간과 오랫동안 가까이 있어 왔지만 끝내 인간에게 동화되거나 복속되지 않은, 그래서 인간의 거울이 되고 집착의 대상이 되는, 귀한 동물들입니다. 그래서 대놓고 고래 잡는 이야기나 고양이 키우는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작가들도 종종 나옵니다. 멜빌의 『백경』이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전자에,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황정은의 「묘씨생(猫氏生)」, 그리고 제가 쓴 『고양이 키우기』는 후자에 속합니다. 멜빌의 『백경』은 괴물 흰고래를 잡으러 떠나는 불굴의 인간 정신을 묘사하고 있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청새치(고래 대용)와 사투를 벌이는 한 늙은 어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두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자작 승리하는 인간의 삶을 그려내는 소설들입니다. 고양이 소설은 일반적으로 작가의 자기 풍자이거나 고양이 눈을 통해 인간 세태를 묘사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이때 고양이는 거울 역할을 맡거나 세필(細筆) 역할을 맡습니다. 인간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거나 인간의 언어로는 포착하기 힘든 상황을 보다 용이하게 그려내는 데 사용됩니다. 그래서 고래와 고양이는 우리 형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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