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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ul 02. 2019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불협화음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30년 전 쯤, 한 선배 작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일종의 ‘관심 받는 작가가 되는 요령’이었습니다.

첫째, 비평가들에게 먹기 좋은 먹잇감을 던질 것(너무 어려운 소설은 쓰지 말 것), 그리고 둘째, 가급적이면 문장은 3(4),4조에 맞추어 쓸 것(구술에 가깝도록 쓸 것), 딱 그 두 가지 당부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선배의 글을 읽어보니 과연 그랬습니다. 누가 봐도 주제가 금방 요약이 되었습니다. 인물은 전형화되어 있어서 갈등관계도 금방 파악이 되었습니다. 과장과 생략이 분명했습니다. 3(4),4조의 율격도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허전했습니다. 무언가 ‘바닥을 치는 느낌(농구공이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내용에서나 문장에서나 꼭 2%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양자 공히 쇳조각으로 유리를 긁는 듯한 ‘불협화음’과는 담을 쌓고 있었습니다. 깊은 곳에서 울림을 주는 아이러니나 독자의 자발적인(강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비약 같은 것은 아예 없었습니다. 비평가들은 작가의 의도를 몇 가지 대립된 개념으로 두부 썰 듯이 가지런하게 배열할 수가 있었고 보통의 독자들은 그 안에서 동반자의 만족감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쉽게 읽히니 작가는 책을 많이 팔아서 좋고 비평가는 큰 노력 없이 책을 ‘통찰’할 수 있어서 좋고, 독자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처남까지 좋은 일이었습니다.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속에서 소리 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 뿐이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8~9쪽]


성공한 선배 작가의 친절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그 ‘관심 받는 작가로 살아남을 두 가지 요령’은 저의 선택과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살리고 싶었던 젊은 저에게는 전혀(진정!) 글쓰기의 참고사항이 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좀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겉으로는 ‘예, 예’ 하면서도 속으로는 되려 그 선배의 장삿속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할 거리, 자기를 돌아다 볼 거리를 주지 못하는 문장들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추풍낙엽, 우수수 떨어져 ‘가문의 수치’로 남을 것이라 예단했습니다.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독자의 사랑과 평단의 총애로부터 멀어진 저의 글쓰기는 더 이상 만족감을 선사하지 못했습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쓰는 작가는 누구에게도 ‘좋은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본인 스스로에게도 결코 그런 글쓰기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언제부턴가 작가 대열로부터 슬그머니 이탈해 있는 저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병대만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인 것이 아닙니다. 작가도 ‘한 번 작가면 영원한 작가’입니다(물론 마음가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자가 작가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제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후 저희 집사람이 제 글을 다문다문 읽습니다. 그 전에는 제 글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 제 책뿐만이 아닐 겁니다. 평소에도 책을 멀리하는 그 소직(素直) 담백(淡白)한 심성을 제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제 페이스북 들들이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 글을 읽고 난 뒤의 비평(첫 소감?)이 재미있었습니다. 잘 안 읽힌다는 겁니다. 그 말을 하면서 진정(?) 짜증을 냅니다. 내용이 어려운가라고 물었더니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랍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크게 웃었습니다. 집사람이 진지하게 접수하라고 경고를 했지만 저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만약 집사람이 그 반대의 이야기를 했다면 저는 좀 섭섭했을 겁니다. 책과는 아주 담을 쌓고 지내는 것 같았는데, 오래된 동물원의 늙은 야수처럼, ‘먹잇감을 잘게 썰어서 주지 않는다’고 으르렁거립니다.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저희 둘이서 그렇게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방에서 책을 보던 집아이가 불쑥 나타나더니 에상 밖으로 제 편을 듭니다(수험생인 아이도 짬짬이 제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 하는데 그 말이 ‘문자 속이 기특’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꺼끌꺼끌했는데 읽다보니 ‘중독성’ 같은 것이 느껴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좋았다고 말합니다. 아이의 그 ‘형식 비평’은 좋은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아이의 말에 맞장구는 보내지 않고 그냥 듣고만 있었습니다. 특별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라는 표현을 『데미안』에서 찾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글쓰기를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것만으로도 흡족해야 했습니다. 저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서 그런 ‘비평’을 접수했다는 게 저의 40년에 육박하는 작가 생활 중에서 가장 보람있는 순간이었습니다(죄송합니다, 이상은 팔불출 행색이었습니다).


인문학 스프 첫째 책인 『장졸우교』를 보신 몇 분의 소감도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저와 한 직장에서 일상을 같이 나누는 분도 계시고 멀리서 지면으로만 뵙는 분도 계십니다. 그분들의 말슴 중에서 “읽기가 매우 괴로웠다.”라는 말씀이 제일 고마웠습니다. 그 괴로움을 통과해서 마지막 장까지 저와 끝까지 동반해 주신 것을 저는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다 읽고 나니 가슴 속에 먹구름 한 장이 짙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고 말씀해 주신 분도 고맙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늘그막에 글쓰기의 정염을 불태우는 제게 큰 용기를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결국은 소설인 것을 알았다고 말씀해 주신 분도 참 고마웠습니다. 무엇이 소설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굳이 나누고 싶지 않았던, 길에 구르는 막대기로 칼을 삼고 가벼운 것을 무겁게 쓰고 싶었던(언감생심?) 저의 속내를 잘 짚어 주셨습니다. 또 한 분이 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의 독자만을 예상해서 글을 쓴다면 누구를 예상해서 쓰겠냐고 물어주신 분입니다. 당근 저는 바로 당신이라고 말했습니다. 늘 관심 있게 제 글을 읽고 조언을 아끼지 않던 분입니다. 그 대답을 내는 데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던 것이 제겐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사족 한 마디. 여전히 제게는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는 헤세의 말이 소중합니다. 마치 부자들만 소장하고 있다는 액면가 높은 진폐(眞幣)와 같습니다. 서민들이 즐겨 쓰는 액면가 낮은 돈들은 부자들이 볼 대는 한갓 위폐(僞幣)에 불과합니다. 아직 쌀통이 텅텅 비어있는 신세도 아닌데 굳이 위폐에 연연할 이유는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못되먹은!). 단, 오늘 제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은 느끼시겠지만, 내용은 몰라도 문장만은 예의 그 선배가 권유한 ‘유쾌한 관습’을 답습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급적이면 구술의 리듬감이 살아나도록 배려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반쪽만이라도, 옛날 그 선배의 권고를 다시 불러낸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죽기 전에 한 권이라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책을 꼭 남기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한 여름 밤(새벽)의 꿈’ 때문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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