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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18. 2019

밤의 그림자들

암흑의 핵심

그의 환영(幻影)이 나와 함께     

처음 글쓰기 공부를 할 때 가장 힘이 들었던 것이 묘사문을 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시간을 정지시켜서 주제의 변죽을 울리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한다고 해도 그저 길게 늘어진 상념(想念)의 나열이나 뜬구름 잡기 식의 묘사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단어들이 그렇게 모여 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나타내야 했는, ‘십리 안이 오리무중(五里霧中)’, 그게 참 어려웠습니다. 암중모색(暗中摸索) 끝에 어떻게 어렴풋이나마 그 이치를 깨치기는 했습니다만 그것 하나 아는데 거의 반평생이 걸렸습니다. 요긴할 때엔 끝내 모르고, 몰라도 그만인 지금에 와서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둔재들이 사는 게 늘 그런 식입니다.     

묘사 중의 묘사, 그야말로 진(眞)묘사는 하늘에서 한 줄로 내려와 나머지 것들을 모두 일망타진하는 계시와 같습니다. 물론 둔재들에게는 그런 은사가 내리지 않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계시는 기다리는 자에게는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아들이 아닌 한 계시를 일상처럼 만나는 일이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계시가 되는 길이 그것을 만나는 유일한 방도라는 걸 젊어서는 몰랐습니다. 제가 그토록 원했지만 끝내 ‘계시가 되는 묘사’를 얻지 못한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도 스스로 계시가 되기 위한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제게는 꺼지지 않는 불패의 환상이 없었던 까닭이라 여깁니다. 글쓰기만이 유일한 삶의 의의라고 예나제나 생각해 왔지만 내심으론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글쓰기가 유일 목적이 되기에는 제 인생이 너무 속악(俗惡)했습니다. 환상이 깃들 문간방 하나도 제대로 마련치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환상이 없는데 제대로 된 글쓰기가 나올 리가 없었습니다. 다 지나간 뒤지만,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한 대목을 읽으며 아쉬운 마음 한켠을 달래봅니다.     


.....나는 커츠에 대한 기억도 우리 각자의 일생에 쌓이게 되는 다른 망자(亡者)들에 대한 기억과 같다고 생각했어. 그 기억은 우리의 두뇌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이내 영영 사라지고 마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 남기는 막연한 흔적 같은 것이지. 그러나 공동묘지의 잘 관리된 통로처럼 고요하고 단정한 거리의 높다란 건물들 사이에 있던 그 높다랗고 육중한 문간 앞에 서자 나는 들것에 누워 있던 커츠가 온 지구와 모든 인간을 삼키려는 듯 게걸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는 환상을 보게 되었어. 그러자 그는 내 앞에 되살아나는 듯했어. 일찍이 이 세상에서 살았을 때처럼 그렇게 살아나는 것이었어. 화려한 외양과 무서운 실체에 대해 싫증낼 줄 모르는 그림자, 밤의 그늘보다 더 어두우며 화려한 달변을 숨기고 있는 주름진 천을 고귀하게 걸친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 되살아났던 거야. 그의 환영(幻影)이 나와 함께 그 집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했어. 들것이랑, 그 들것을 든 유령 같은 사람들이랑, 그에게 순종하는 숭배자들로 구성된 그 야성적 무리랑, 숲의 어둠이랑, 침침한 만곡부(彎曲部) 사이로 뻗어 있던 번쩍이는 강기슭이랑, 심장의 고동처럼 감싸여진 소리를 규칙적으로 울리는 북소리 같은 것들이, 다시 말해 만물을 정복하는 어떤 암흑의 심장이 그의 환영과 더불어 그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했어. 밀림을 위해서는 그것이 승리의 순간이었고 복수심으로 가득한 내습(來襲)이기도 했는데, 또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내 혼자 힘으로라도 그 내습을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보이더군. 그리고 멀리 콩고의 참을 성 있는 숲속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머리에 뿔을 장식한 인간들이 날뛰고 있을 때 그들을 등지고 내가 커츠의 말을 들었던 기억, 그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던 어구들이 되살아나고 불길하고 무섭도록 단순하게 다시 들려오는 것이었어. 그의 그 참담한 호소, 못난 협박, 엄청난 규모의 간악한 욕망, 그 야비함, 그 고통, 그의 영혼이 겪은 그 폭풍 같은 고뇌 등이 기억나더군. <중략> 나는 2층에 있는 어느 마호가니 출입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울렸어.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동안 마치 커츠가 그 유리판 같은 판넬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더군. 마치 온 우주를 감싸안고 규탄하고 혐오하듯이 휘둥그렇게 뜬 커다란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었어. 나는 그가 <무서워라! 무서워라!>고 속삭이듯이 외치는 것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어. [조셉 콘래드, 이상옥 옮김, 『암흑의 핵심』 , 민음사, 2004(4쇄), 166~167쪽]     


커츠의 유품을 전하러 그의 약혼녀 집을 찾았을 때의 절박한 소회를 묘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커츠의 유품이 대충 정리가 되고나서 주인공(말로)은 그의 약혼녀를 찾아갑니다. 남자들의 누구나 ‘여자의 남자’이기 때문에 ‘그의 여자’를 보면 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커츠의 죽음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여자의 거처에 들어서면서 화자 주인공은 시쳇말로 ‘커츠 빙의’를 경험합니다. 번들거리는 호화스러운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커츠를 방불케 한다고 기술합니다. 저에게는 『암흑의 핵심』보다 <지옥의 묵시록>이 먼저입니다. 그 영화는 제게 커츠의 <무서워라! 무서워라!>라는 단 두 마디만 남겼습니다. 영화는 그 짤막한 대사를 영상 위에다 지루하게 펼쳐놓은 듯한 느낌을 선사했습니다.     

오늘도 그 장면, 그 음성이 생각납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밤의 그림자’들, ‘암흑의 심장’, ‘유령 숭배자들’의 실체를 문명의 한 복판(심장)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주인공의 심사가 전율을 타고 전해 옵니다. 이 한 페이지에 『암흑의 핵심』이라는 소설 전체의 주제가 압축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고 있는 커츠를 ‘깜싸안고’ 있던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아프리카의 자연과 그의 유품을 전달하기 위해 찾은 ‘공동묘지’ 같은 고급 주택가의 대비적인 묘사로 시작합니다. 이 ‘제목의 의미가 드러나는 대목’을 작가는 어디서 찾아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가 겪어낸 일상의 부스러기들이 자신의 경박스러움을 모두 벗어던지고 ‘마호가니 출입문’처럼 무겁고 화려하게 우리 앞에서, 우리를 비추며, 이렇게 장엄하게 서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까닭이 궁금해집니다. <무서워라! 무서워라!>가 그에게는 어느 정도의 울림이었을까도 궁금해집니다. 어느 정도여야 이런 글이 가능해질까, 그런 ‘때 늦은 후회’와 함께 하는 궁금증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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