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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09. 2019

악마와 대장장이

세 가지 소원

악마와 대장장이

옛날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재미난 이야기 공식 하나를 발견합니다. 주인공의 어리숙하고 순진하고 무모한 행동이 훗날 '지혜롭고 용감한 행동'으로 그 진가를 톡톡히 인정받는다는 겁니다. 물론 그 인정이 일종의 ‘우격다짐 식’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결과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충분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 것이 '옛이야기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춘향전이나 심청전이나 흥부전의 스토리가 모두 그렇습니다. 그들 주인공들의 비현실적인 현실 대응은 언제나 큰 보상을 받습니다. 항상 되로 주고 말로 받습니다. 그들의 ‘조롱받을만한 모험, 분수 모르는 선행, 융통성 없는 도덕’은 잠깐 동안의 고초를 부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영원한 승리를 부르는 ‘인생의 승부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 ‘어리숙하고 순진한 주인공’들은 결과적으로 인생의 고단수(高段數)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런 고단수의 활약을 자주 보기가 힘듭니다. 보통의 경우는 그들 '인생의 고단수'들이 죽고 나서야 그들이 고단수였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살아생전에는 그들을 몰라봅니다. 그래서 그런 고단수들의 '살아생전의 이야기'는 곧잘 신화로 치부합니다. 현실에서 잃은 것을 이야기 속에서 보상받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서양 민담을 보시면 제 말에 충분히 동의하실 것입니다.


...가장 고단수의 술책을 보여주는 「악마와 대장장이」(이야기 유형 330)를 마지막으로 고려해보자. 한 대장장이가 “개나 다름없이 종교를 믿지 않지만” 문 앞에서 두드리는 모든 거지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지 않고는 견디질 못한다. 곧 그 자신도 구걸을 할 지경에 이르지만 그는 대장간에 되돌아가 7년 간 곤궁에서 벗어나 살게 한다는 조건으로 영혼을 악마에게 팖으로써 구걸은 모면한다. 그가 부주의한 적선이라는 옛 습관을 회복한 뒤에 예수와 성베드로가 거지로 변장하여 그를 방분한다. 대장장이는 그들에게 훌륭한 식사와 깨끗한 옷과 정결한 잠자리를 제공한다. 보답으로 예수는 그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성베드로는 그에게 낙원을 소원하라고 충고하지만 그 대신 그는 비교훈적인 것을 소원하며 그것은 이야기의 다른 판본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즉 좋은 식사(바꾸어 말하면 빵, 소시지, 충분한 포도주라는 평상적인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 그가 언제나 이기는 카드를 달라. 그의 바이올린이 모든 사람을 춤추게 만들어달라. 그의 가방에는 그가 원하는 것이 들어가게 해달라. 그리고 대부분의 판본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의 벤치에 앉는 사람은 거기에 붙어 있게 해달라는 소원이다. 7년이 끝나갈 때 악마의 심부름꾼이 대장장이를 데려가려 할 때 그는 평상시처럼 환대하고는 그가 벤치에 붙어 떨어지지 않도록 만들어 7년을 더 연장받는다. 그 7년이 다시 지나 두 번째의 악마의 사자가 오자 그는 그 심부름꾼을 가방 속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소원하고는 또 다시 7년을 얻을 때까지 그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두드린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옥에 가기에 동의하는데 겁에 질린 악마가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판본에 따라서는 악마와의 카드놀이에서 이겨 지옥을 벗어난다. 악마와의 도박에서 이겨 얻어낸 저주받은 영혼의 무리를 이끌고 그는 천국의 문턱에 도달한다. 성베드로는 그가 불경죄를 범했다 하여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바이올린을 꺼내 성베드로가 누그러질 때까지 춤을 추게 하거나 판본에 따라서는 가방을 천국의 대문 위로 던져넣고는 그 자신이 가방 속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소원한다. 그런 뒤에 어떤 판본에서 그는 천사들과 카드놀이를 하여 불 옆의 장소로, 의자위의 자리로, 그리고 마침내는 성부와 근접한 지위까지 올라서는 것이다. [로버트 단턴(조한욱 역), 『고양이 대학살』, 94~95쪽]


위의 이야기에서는 모의쟁투, 혹은 주술 경합이 항상 주인공에게 유리한 쪽으로 정해집니다. 주인공이 가진(능한) 것에 따라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이나 실수가 정해진다는 패턴입니다. 대장장이에게는 가능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불가능한 게임이 주로 선택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주술이나 능력이라는 게 오직 한 가지 능력(성격)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선하냐(착하냐) 그렇지 못하냐가 유일한 기준입니다. 제비가 흥부와 놀부에게 물어다 준 박씨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선한 사람인가 아닌가이지 다른 변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 안에서의 성공 사례에는 사실 단수(段數)가 없습니다. 단수가 있어 보일 뿐입니다. 이야기는 그저 그럴듯하기만 하면 됩니다. 앞뒤 이야기가 서로 잘 엮이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문제는 선(善)에 있지 기교나 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마와 대장장이』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잘 어우러져서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대장장이, 악마, 예수, 성베드로와 같은 원형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에게 합당한 역할을 맡겨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그럴듯한 이야기를 통해 삶의 의미 없음에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악마나 예수나 성베드로는 그렇다치고(지상의 존재가 아닙니다), 대장장이 주인공에 대해서 한 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대장장이는 무엇인가 ‘불을 지펴서 쇠에 열을 가하고 두드려서 필요한 도구(새 것)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불을 다루는 인간-프로메테우스적 존재-이라는 것은 그가 신과 교접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도 가집니다). 그러므로 대장장이는 인간 중에서는 가장 행동력과 실천력이 있는 축에 속합니다. 인간계의 대표선수라 할만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대장장이 스토리텔링’의 텍스트 무의식은 ‘인간’이 ‘인간 아닌 것들’과 겨루어서 승리한다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때 그가 가진 가장 확실한 무기(능력)가 되는 것이 사랑(적선)이고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거지요.

그것 말고도, 이 이야기에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 ‘카드놀이에서 늘 이기는 패를 가지는 것’, ‘누구든 춤추게 하는 바이올린을 가지는 것’ 등의 화소(話素, 소설 등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단위)가 재미가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그저 그렇습니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악마의 유혹’만큼 달콤한 것이 또 있을까요? 누구나 일생 동안 몇 번은 악마의 유혹을 받습니다. 제 경우에도 대장장이와 비슷한 ‘거래’가 있었습니다. ‘아, 이런 게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에게 영혼을 사겠다던 악마가 다른 더 큰 악마에게 토벌되는 바람에 그 거래는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남 일 같지가 않습니다.
‘카드놀이에서 늘 이기는 패’를 소원한다는 것도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실속 있는 것입니다. ‘카드놀이에서 늘 이기는 패’는 사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만 해결되면 인생은 결국 ‘카드놀이’일 뿐입니다. 권력관계든, 명예가 걸린 일이든, 취미생활이든, 인생은 고작 ‘카드놀이’일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카드놀이에서 지면 사는 맛도 없어집니다. 그러니, 그것을 소원한다는 것은 결국은 ‘승리하는 인간이 되겠다’라는 것에 진배없습니다.
‘누구라도 춤추게 하는 바이올린’도 마찬가집니다. ‘승리’ 위에 있는 것이 ‘춤’입니다. 예술이고 자기만족의 열락입니다. 누구를 때려눕히고 얻는 승리가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나누어 가지는 열락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인생은 그야말로 유종의 미를 장식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소원은 아무나 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대장장이쯤 되니까 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든 남을 위해 만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소원을 빌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대장장이가 빈 소원은 어리숙하거나 순진하거나 무모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악마를 따돌리고, 늘 이기는 카드 패를 얻고, 누구라도 춤추게 할 수 있는 바이올린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인생에서 가치있는 그 모든 것을 갖겠다는 말에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족 한 마디. 앞의 두 개는 더 빌어볼 염치나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하나라도 제대로 빌어서 소원 성취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누구라도 제 방문 앞에서 얼씬거리며 문을 두드려야 할 텐데, 그래야 ‘부주의한 적선’이라도 한 번 해 볼 텐데, 여태 소식두절, 그저 적막강산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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