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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3. 2019

뜨거운 것이 좋아, 취화선

원래 그런 것들과 입화자소

뜨거운 것이 좋아취화선 


곰 TV 무료영화 보기에 재미가 붙었다. 며칠 전에는 <뜨거운 것이 좋아>(권칠인, 2008)를 봤다. 오늘은 <취화선>이다. <뜨거운 것이 좋아>는 내 영화 취향의 맹점(盲點)을 확실하게 보여준 영화다. 만약 유료로 보라고 했다면 절대로 안 볼 영화다. 내 청소년 취향의 영화관 안에서는 상영불가 판정을 받을 영화다. TV 드라마도 그런 류의 소재를 다루는 것들은 아예 안 본다. 그래서 김수현 드라마는 늘 내게 홀대받는다.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리얼리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그 이유뿐이다. 특히 남녀상열지사를 리얼하게 묘사하는 리얼리즘 영화는 최우선 기피대상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런 영화를 돈 주고 본 적이 거의 없고 그런 영화를 대상으로 한 영화 이야기도 거의 없다(내 영화이야기를 몇 편 읽어본 독자는 이해하실 거다). 그러니까 <뜨거운 것이 좋아>는 내게 아주 예외적인 영화다. 내 관심 목록에 아마 가장 먼저 들어온 리얼리즘 멜로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저 심드렁히, 정말 할 일이 없어 본 이 영화가 의외로 재미있었다. 초기의 감정이입 단계에서 약간의 버퍼링(?)이 필요했지만, 큰 어려움이 없이 이내 몰입이 되었다. 감독의 시야가 투명했다. 투수로 치면 정통파 투수였다. 에로티즘을 전경화해서 세 여자의 정체성 서사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었다. 이를테면 여자의 삶에서 의미 있는 게 무엇인가? 에로티즘은 무슨 의미인가? 세대를 달리하는 가족 내적 여자들에게 서로는 어떤 의미인가? 등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었다. 소년기 동성애, 젊은 날의 사랑과 야망(?), 기약 없는 중년의 불꽃놀이(그렇다고 불장난은 아니다) 등, 사랑을 둘러싼 청소년기, 결혼 적령기, 만추(晩秋)기의 여성 심리가 디테일하게 잘 그려지고 있었다. 다만 너무 리얼리스틱한 것들이 오히려 영화에서는 극적 몰입을 방해하는 수도 있다는 걸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무엇보다도 김민희와 안소희의 연기가 예뻤다. 연기 안에서 예쁜 배우가 진짜 예쁜 배우다.


<취화선>(임권택, 2002)은 수 년 전에 TV로 일부 본 적이 있었지만, 전편을 감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용은 장승업의 일대기다. 주인공의 일대기는 때로 진부했다. 특히 최민식의 늘 식상해 보이는 연기 때문에 더 그랬다. 장승업의 일대기가 아니라 최배우의 일대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대단한 영상미가 최민식을 집어삼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한 폭이 그림이었다. 망발이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오원의 그림이 오히려 제일 못한 그림이었다. 대단한 화가 이야기니 영상미 쪽에서도 대단해야 되겠다는 감독의 욕심이, 노심초사가 화면 곳곳에서 배어나왔다. 미(美)든 미(味)든, 악(樂)이든 화(畵), 선(善)이든 악(惡)이든, 무엇이든 지극한 모습을 보이면 누선(淚腺)을 자극하는 법이다. 이 영화도 그랬다. 보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찡할 때가 많았다. “그림 보는 자들은 자기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오원의 상투적인 대사도 이상하게 코끝을 찡하게 했다. 마지막의 입화자소(入火自燒), 오원이 불구덩이 속으로 자기 몸을 집어넣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도 내 책상 위에 걸려 있는 입화자소(入火自燒)를 그렇게 영화 속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흔 살 이후로 나는 그 글귀를 항상 내 앞에 두고 살아왔다. 또 하나, 무릇 모든 예술 중에서 에로티즘을 지향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요소요소 배치되어 있는 도저한 도색(桃色)도 충분히 좋았다. 그런 면에서 <취화선>도 또 한 편의 <뜨거운 것이 좋아>였다. 


사족 한 마디. 지금은 서른 살 청년이 된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대는 나나 아이나 유일한 취미가 비디오 감상이었다. 아버지가 비디오를 빌리러 가면 으레 따라와서 자기 볼 것도 챙겨서 갔다. 하루는 아이가 비디오테이프 <드래곤볼>을 빌려서는 텔레비전을 코앞에 두고 세상모른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뒤로 물려놓으면 어느새 또 그렇게 다가앉아서 보곤 했다(결국 나중에 라식 수술을 했다). 아들을 TV에서 떼어놓으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부지불식, 극 중 주인공 손오공의 아버지 이름도 손오반이고, 손오공의 아들 이름도 손오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코흘리개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름하고 손자 이름이 어떻게 똑같냐?”

그러자 아들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대답했다.

“원래 그래요!”

놈은 별걸 가지고 다 시비를 건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 정도야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런 어투였다. 더군다나 작가가 이미 그렇게 지어서 내놓은 일을 우리가 어떻게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런 심사였던 것 같았다. 또 이 이야기 자체가 판타지인데 그런 네이밍이 오히려 더 어울리지 않느냐는(물론 이건 내 생각이다) 공감대도 형성이 되어 있는 듯했다.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원래 그런 것’을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요할 것 같다. <뜨거운 것이 좋아>를 보고 난 후의 내 심정이 그렇다. 연애의 리얼리즘을 싫어하는 콤플렉스도 빨리 벗어던져야겠다. 그것 빼고 볼 거라곤 결국 <도깨비> 같은 황당 연애나 <추적자> 같은 황당 정치나 <왕이 된 남자> 같은 황당 역사 패러디나 기타 활극들뿐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오직 내 것인, 반복되는 일상들을 너무 홀대하는 것은 아닌지, 내 곁의 ‘원래 그런 것들’에게도 좀 더 다정한 시선을 가져야겠다는 때아닌(이 나이에 또?) 반성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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