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부를 싫어한다. '다 큰 어른이 편식한다’는 말이 민망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지금도 두부가 썩 반갑지는 않다. 그렇다고 전혀 먹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두부만 떠올리면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그 이유는 두부가 주는 고생스러운 인상 때문이다.
나는 강원도 평창, 산골에서 태어났다. 집에는 아궁이가 있었고, 가마솥에 물을 끓여 빨간 고무통에 받아 목욕을 하곤 했다. 어린 내게는 마냥 신나고 즐거운 놀이 같았지만, 되짚어 보면 분명 가난과 함께했던 시절이었다.
직접 수확한 콩을 깨끗이 골라내고, 밤새 불려둔 콩을 멧돌에 갈아 콩물을 낸다. 그 콩물을 가마솥에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한쪽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저어주어야 한다. 눌어 붙지 않도록, 탔다는 흔적이 없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이윽고 간수를 부어 사각틀에 굳혀 내면 비로소 두부 한 모가 탄생한다. 나는 그 지난한 과정을 어릴 적부터 봐 왔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별맛도 없는 두부를 만들어야 하지?’라는 어린 마음의 의문이 늘 따라다녔다.
힘들게 완성된 두부를 엄마는 자랑스럽게 잘라 내 입에 넣어주려 했지만, 나는 조금 먹는 척하다가 슬쩍 도망치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궁이도 사라지고, 커다란 가마솥은 고물상에 팔려나갔다. 이제는 마트에서 사온 두부를 국이나 찌개에 무심히 넣고 끓여내고 골고루 먹으라며 잔소리를 하는 엄마가 되었다. 그러니 ‘내가 싫어한 그 두부’가 사실은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버린 것 같다.
가끔 엄마 손을 잡아 보면, 나이든 두툼한 손마디가 전해 준다. 그 마디마디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콩을 고르고, 멧돌을 돌리고, 뜨거운 가마솥에 팔을 걷어붙이던 노고가 스며 있다. 땀 냄새와 뜨거운 김, 간수와 함께 깃들었던 엄마의 마음이 그 손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 내 나이보다도 한참 어린 여자가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어린 나는 두부를 ‘고생스럽고 맛없는 음식’으로 치부했지만, 사실 그것은 가족의 온 정성과 노력이 응집된 귀한 음식이었다. 내게 두부란 그런 의미다. 싫어하기보다는 미처 그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두부를 만들던 그 풍경은 사라져도, 그것이 담고 있던 마음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 옆에서 엄마와 아빠가 부대끼며 나눈 대화와 웃음, 콩물을 젓던 작은 손의 온기, 간수가 서서히 만들어 내는 하얀 덩어리에 깃든 기다림까지.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두부 한 모를 만들기 위해 들였던 눈물겨운 정성은, 결국 사랑이었다. 지금도 두부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 두부에 담겼던 우리 가족의 삶과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별맛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음식이, 알고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했던 맛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