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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캉가루 Oct 29. 2020

등교 첫날

빅토리아 시내 투어, 친구 사귀기


제대로 시차 적응할 틈도 없이 도착한 다음 날부터 학원에 가야 했다. 내가 다녔던 학원은 일주일 단위로 새로운 친구들이 들어오는데 오늘은 나를 포함한 이번 주자 new students들의 오리엔테이션 및 웰컴투어 날이었다. 홈스테이 집이 있는 Sidney에서 학원이 있는 Victoria 시내까지는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가 걸렸다. 같이 사는 한국인 언니 N과 브렌다가 모두 나와 같은 학원을 다녔는데, 월요일은 등교시간이 비슷한 브렌다와 첫 등굣길을 함께 했다. 


집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나타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브렌다와 어색한 기류 속에 버스를 기다려서 72번 버스를 탔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2번 버스는 해안도로를 달렸다. 한국에서 홈스테이 주소를 미리 받았을 때, 학원에서 생각보다 거리가 있어서 타지에 와서도 왕복 2시간씩 통학을 해야 하나 한탄했는데 해가 내리쬘 준비를 하는 바닷가를 보며 그동안 해묵은 걱정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 이곳을 매일매일 지나갈 수 있다니! 이런 곳이라면 통학 4시간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루 동안 버스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데이패스. 10월부터는 먼슬리패스를 끊었다.
등굣길의 해안도로. 





오늘 나와 함께 첫 번째 날을 맞는 친구들은 11명이었다. 멕시코, 칠레, 일본, 콜롬비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모두 얼굴에는 쾌활함에 묻어있었지만, 낯선 곳, 낯선 나라에서 온 친구들 앞에서 그들도 모르게 긴장한 눈치였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 몇 살이냐 등을 묻고 나서, 할 말이 없어 어색해지는 건 만국 공통인 건가. 어색하다는 건 참 희한한 감정이다. 사실 서로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일지라도 자칫하면 무례해질 수 있어 말을 참는다. 그러나 어떨 땐 아무도 깨지 않는 어색함이 더 무례한 분위기를 연출하니 말이다. 


나를 포함한 10명 중 대다수의 친구들은 10대였다. 그들이 처음에 보였던 어색한 입꼬리는 머지않아 모터가 달린 듯 트였다. 고작 몇 살 차이 나는 나이 탓인지 그들끼리 느끼는 남미인들의 유대감 때문인지 점점 그들의 대화에 끼기 힘들어졌다. 소위 "요즘 것들"의 대화를 보고 있는 부장님의 심정을 고작 만 21세에 처음으로 느꼈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빅토리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투어를 시작했다. 이곳은 내가 생각했던 캐나다와는 전혀 다른 곳이구나. 캐나다는 가장 먼저 '대자연'을 떠올리게들 하는 나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표적인 도시들은 토론토, 밴쿠버 등 가장 역동적인 도시적인 분위기를 띠는 곳들이다. 한국에서 내가 생각했던 빅토리아는 일주일에 몇 번씩 카약을 타고 다니는 평화로운 목가적인 도시였다면 이 날 느낀 빅토리아의 첫인상은 오밀조밀 아기자기하면서도 있을 건 다 있는 귀여운 도시였다. 실제로 영국 식민지 시절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 때문인지, 다운타운에 있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유럽풍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타국에서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가 훨씬 어렵다. 외양은 명백한 한국인인데 영어로 말을 걸기도 좀 그렇고, 한국어로 말을 걸었는데 한국인이 아닐 수 있는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인 같은 사람을 보면 먼저 말을 걸기가 주저된다. 나에겐 사야카가 그랬다. 

사야카는 나랑 동갑인 일본인 친구였다. 이 친구를 처음 봤을 때, 누가 봐도 한국인 같은 외양이어서 말을 걸기가 꺼려졌다. 학원에서 정보 확인을 하면서 여권을 내보일 때 빨간색 여권을 꺼내는 걸 보고 자신감 있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이곳에 올 때 서울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경유를 했는데, 대한항공 승무원이 자신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한국인이 인정하는 한국인 얼굴이었다.


11명 중 동양인이 나와 이 친구밖에 없어서인지, 이 날은 사야카와 거의 하루 종일 온갖 대화를 다 했다. 내 4번의 일본 여행부터 일본 영화, 일본 배우까지 일본에 관한 거의 모든 주제를 봇물 터지듯 쏟아냈고, 성격 좋은 사야카는 내 말에 덧붙여 일본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줬다. 그렇게 우리는 만난 지 3시간 만에 내년에 서로의 나라에 놀러 가기로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약속은 코로나 때문에 무산되었지만. 




투어는 4시경에 끝이 났다. 나는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구글 지도로 열심히 위치를 찾아 '러쉬'매장에 갔다.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구매할 수 없었던 '트와일라잇 바디스프레이'를 사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캐나다 러쉬 가격이 저렴한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저렴했다. 한국에서 35,000원 정도인 바디스프레이가 여기에서는 한화 26,000원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바디스프레이에 예정에도 없던 샴푸까지 함께 구매했다. 


한국에서는 절대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편이 아니었지만 계산하면서 점원에게 "내 나라에서는 러쉬가 엄청 비싼데 여기는 저렴해서 놀랐어요"라고 말했다. 낯가릴 틈도 없이 점원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머리에서 열심히 단어를 조합하고 있었다. 점원은 무슨 나라에서 왔냐면서 캐나다 러쉬가 전 세계 러쉬 중에서도 슈퍼 칩(super cheap)하다며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엄지를 들어올렸다. 







모든 게 새로워! 짜릿해!  등굣길의 해안도로도, 처음 사귄 친구 사야카도, 어딜 가나 친절한 사람들도, 삐뽁삐뽁대는 신호등 소리까지 이 도시의 하나하나 모든 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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