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생 밀레니얼 세대인 내가 부동산에 빠진 이유 10탄
자 계약서 내용 다 설명드렸고 인적사항 확인하신 다음에 이름 옆에 싸인 하시면 됩니다
사장님 싸인 전에 집 한번만 더 보고 오면 안될까요?
이게 무슨 상황일까.
1시간 전 부동산 사장님이 가성비 좋은 나홀로아파트가 있으니 보기나 하라고 했는데 어느샌가 부동산에 앉아서 계약서를 쓰고 있다니. 그것도 전혀 쿨하지가 않습니다. 계약을 완료하기 전에 집을 한번 더 보고 싶다니. 최대한 계약을 뒤로 미뤄보겠다는 심산이 엿보이는 이 대화.
집투어를 마치고 부동산 사장님의 뒤를 따라 부동산으로 돌아가던 길에 사장님의 추천으로 한 나홀로아파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33평에 4.7억짜리 집이 있는데 가성비가 아주 좋다고. 한번 보기라도 하라는 말씀에 처음에는 봐봤자 사지도 않을텐데 왠 시간낭비? 라고 생각했지만 경험치를 쌓는 개념으로 한번 보기나 하자 하고 따라 간 것이죠.
[세 번째 집]
- 33평 4.7억
- 동향, 계단식, 16/17층, 발코니확장
- 95년식
- 세대수 231세대 1개동 나홀로아파트이나 옆 3개동 짜리 아파트와 단지처럼 지냄.(한동짜리가 231세대라니 어마어마하게 큰 나홀로였으나 그래도 나홀로는 나홀로)
- 용적률 : 378%
- 이 집을 보기로 한 이유 : 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지나가는 길에 비교대상으로 한번 보기나 하자
이 집은 딱 들어간 순간 헉 했습니다.
베란다 전창으로 동네가 시원하게 펼쳐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소풍으로 자주 가던 산도 보였어요.
집도 정말 넓었어요. 살고 있던 집도 전용 20평 정도 됐었고, 오늘 봤던 집들도 다 25평 남짓한 것들이었는데 갑자기 33평을 들어와보니 넓다고 느껴질 수밖에요. 발코니도 확장되어 있었습니다. 부동산 사장님이 수리한 부분이 어디어디냐고 묻자 집주인은 전부 다 싹 올수리 한거라고 답했습니다. 물론 아마 올수리한게 한 10년전쯤이겠지만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집주인의 애착이 깊어보이는 집이었습니다.
남편은 이 집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어땠냐구요? 마음으로는 마음에 들었지만 머리로 자꾸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이 집은 안돼. 이 집은 나홀로야. 용적률도 300%가 넘는다구. 재건축도 안되고. 나중에 거래도 안되고. 아무것도 안돼. 지금 이 집이 왜이렇게 싸겠어? 투자가치 제로야 제로.’
심지어 더 뜨악했던 건 거래도 안되고 값도 오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이 나홀로가 올해 들어 거래가 몇 건 되면서 계속 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올해 초만 해도 4.3억에 거래됐던 집이 5월에 4.6억까지 올라와 지금 이 집을 우리더러 4.7억에 사라는 거였어요! 심지어 작년에는 4억이었다구요! 아니 한달 월급이 3백만원 남짓인데 한달만에 4억짜리 집값이 1천만원씩 오른다구? 하.
정말 만약에 4.7억짜리 집을 샀는데 이 집을 다시 사 줄 내 뒷사람을 찾지 못해서 영원히 이 집에 살게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이게 지금 20살짜리 집이니까 20년쯤 더 산다고 치고 4.7억을 240개월로 나누면....한달에 200만원짜리 월세랑 같잖아? 이게 말이 돼?? 어차피 한달에 200짜리 월세를 살거라면 좀 더 번듯한 집을 가는게 맞지 않을까? 이런 변두리에 나홀로 아파트 말구!
그렇지만 이 집을 보고나서 뭐에 홀린듯 우리는 부동산으로 향했고 그렇게 계약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뭐에 홀렸다'라는 표현이 그냥 얼버무리려고 쓴게 아니라 정말로 그랬어요. 도저히 이 집을 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심지어 사려던 집 리스트에 있지도 않았었는데 이렇게 지나가다가 한번 슥 보고 사기로 한다구? 심장이 두근거리고 '안돼 안돼 이건 아니야' 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발걸음은 왠지 부동산 사장님을 계속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과거시세를 조회해보니 08년 위기에도 큰 폭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실수요자들만 사는 아파트니까 등락폭이 적은 것일 수도 있고, 대폭락 시기에 거래 자체가 아예 안되서 낮은 실거래가 찍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이 부분도 장점인 듯 했다가 단점인 듯 했다가 머릿속이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이 집에서 15~20년 정도 사신 분이었는데 팔고 바로 옆 40평대로 이사가려고 집을 내놨다고 했어요. 저와 동갑인 딸이 아이를 낳아서 같이 살게 되었다고 해요. 저는 그당시 29세로 요즘 세상에 안맞게 굉장히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편이었는데 이 집 딸래미도 그랬다고 하니 참 신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주인 아주머니도 비슷했는지 친절하게도 이 집은 근처에 초등학교도 있고 어린이집도 많고 마트도 가깝다고 깨알 정보들을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근데 불경스럽게도 제 마음은 이랬습니다.
저기요. 아줌마. 제가 아줌마보다 이 동네 오래 살았거든요. 이 집 별론데 자꾸 좋게 보이려고 허튼 수작 부리지 마시고 그냥 가만히 계셔주실래요. 저 진짜 머리가 복잡하거든요.
아무튼 계약서 싸인하기 직전 저는 집을 한번 더 보고 싶었고 그렇게 집주인 아주머니를 구슬려서 한번 더 집을 보러 갔습니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계약이 완전히 성사됐다고 생각했는지 자기는 부동산에 있을테니 우리끼리만 가서 집을 보고 오라고 했어요.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방금 내려왔던 그 엘리베이터에 다시 몸을 실었습니다.
그 집에 도착하니 아까 말했던 그 저와 동갑이라던 딸래미가 그의 딸래미에게 젖병으로 분유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동향이라 해가 쨍하게 드는건 아니지만 은은하게 해가 들고 창밖으로는 가까운 거리에 산과 파란 하늘이 꼭 동화책 배경처럼 느껴졌어요. 방금 전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땐 집주인 아주머니가 무조건 이 집을 팔겠다는 생각으로 온 방에 불도 다 켜고 계속 쫓아다니면서 이 집은 뭐가 좋고 주변은 어디가 좋고 블라블라 해대서 집중이 잘 안됐는데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찬찬히 둘러보니 아늑하고 안정감있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저는 세 달 뒤 이 집 거실에 앉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아이에게 분유을 먹이는 운명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