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결심하게 되는 순간
생산자의 삶을 살아야겠다.
AI에게 정복당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은 했는데 뭘 해야 할지는 전혀 가늠이 안됐다.
지금 이 순간부터 향후 한 5년쯤은 무난히 월급 잘 들어오고 생활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이후는 어찌 될지 모른다니. 이게 단순히 내가 고용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은 사기업 직원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사회가 변해서 그런 거라면 많이들 차선책으로 선택하는 공무원이 되는 것도, 전문직이 되는 것도 답이 아니라는 건데. 직장생활 말고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는 느낌. 당장 생계가 막막해서 막 엄청 절실한 건 아닌데 그래도 뭔가 해야 될 것 같은 느낌.
그냥 좀 찜찜한 느낌이었다.
정말 세상이 그렇게 쉽게 바뀔까? 그래도 내 한 몸 땅에 뉘어질 때까진 인간이 AI 로봇보다 득세하지 않을까? 정말 AI 기술이 그렇게 발전한 건 맞나?
한 번도 제대로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AI 때문에 갑자기 인생의 방향을 틀려고 하니 답이 안 보였다. 갑갑한 마음에 주변에 이야기를 해보아도 돌아오는 반응은 한결같았다.
얘가 미쳤나.
얘 또 이상한 소리 하네
그랬다. 나는 항상 이상한 소리를 잘하던 애였다. 어떤 자극이 있을 때 그것에 쉽게 감화되는 타입이었다. 누가 곧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하면 개소리 하구 있네 하는 게 아니라 진짜? 하고 한번 되묻곤 하는 타입.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읽는 것이었다.
AI, 4차 산업혁명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알게 된 확실한 사실은 곧 인류는 엄청난 양극화를 겪게 될 것이며, 그 기준은 각자의 가치 창출 수단이 디지털 기술에 지배받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일상생활의 디지털화 속도는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 같은 일반 사무직 개미들은 그냥 사회변화에 휩쓸려 기본소득 정도 받으며 근근이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소득이라는 것도 세금 걷어서 아무 데나 살포하는 포퓰리즘 정책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양극화가 극으로 달해 소비할 수 없는 계층이 많아진 시대에서 최소한의 자본주의가 돌아가기 위한 장치였다. 돈이 있어야 뭐라도 살 테고 그래야 경제가 돌아갈 테니까.
AI와 디지털 기술, 미래 산업 등과 관련된 책들은 처음엔 어려웠지만 읽어갈수록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접하게 된 책이 한 권 있었다. 신태순 작가의 <게으르지만 콘텐츠로 돈은 잘 법니다>라는 책이었다.
다소 뜬금없지만 자본 없이 콘텐츠로 10억 벌었단다. 콘텐츠가 나 대신 돈 벌게 하란다. 처음엔 이게 뭔 소리지 싶었다. 콘텐츠가 뭘 말하는 건지도 몰랐다.
책의 내용은 한 번 읽어서는 이해가 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책 내용이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내가 아는 상식과 너무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요점은 말 그대로 콘텐츠를(특히 온라인 콘텐츠, 예를 들면 온라인 상에 쓰는 글이나 영상 등) 잘, 열심히, 많이 만들어서 그걸 토대로 내 사업의 매출을 증대시키라는 이야기다. 근데 그렇다면 게으른 게 아니지 않나? 정말 게으르게 돈 잘 버는 책이라면 표지에 거북이가 아니라 토끼나 베짱이가 있어야 맞는 것 아닌가?
어쨌거나 나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또 이 책에 감화를 받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창의적인 인간의 영역, 크리에이팅이라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에 대한 공감, 배움, 스트레스 해소 등의 역할은 결국 인간이 맡게 되지 않을까? 아니 이 분야도 AI한테 정복당하게 되더라도 그전까지는 나도 좀 게으르게 돈 벌어보는 생활을 해 보고 싶다. 나인 투 식스 징글징글하다 증말
그 당시 나는 읽은 책들을 정리해서 네이버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기 시작했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는데 기록을 안 하다 보니 나중에 내용을 다 까먹어버리는 게 아까워 한 줄 두줄이라도 남겨보자 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신태순 작가의 <게으르지만 콘텐츠로 돈은 잘 법니다> 내용을 정리해서 서평을 올렸다.
그랬더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작가님이 내 글에 댓글을 달아준 것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댓글을!
그것도 글 올린 지 하루 만에!!!
지금이야 이런저런 글을 통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책을 낸 사람 =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충격이 컸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끄적이기만 했을 뿐인데 작가와 독자를 연결해주다니. 이게 온라인 콘텐츠의 힘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신태순 작가님의 댓글에는 <게으르지만 콘텐츠로 돈은 잘 법니다>의 저자 편집본 영상으로 가는 링크가 적혀 있었다. 냉큼 클릭해서 가서 영상을 본 뒤 느낀 점은.
아 내가 책 내용을 (한참) 잘 이해를 못했구나...(긁적)
그리고 여기서 또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되는데, 저자가 운영하는 <게으르지만 콘텐츠로 돈은 잘 버는> 사람들이 모인 단톡 방에 입장하게 된 것이었다. 그곳에는 자기가 만든 콘텐츠로 사업화를 도모하고 그것을 이용해 게으르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처음엔 이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 이 사람들이 올리는 글이나 영상들을 보고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맨땅에 헤딩, 그냥 시간 버리는 거 아닌가...싶었다. 굉장히 정성스럽게 쓴 글, 오랜 시간 들여 작업한 영상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걸 통해서 뭐 어쩌라는 거지? 심지어 구매 링크가 걸려있거나 서비스 등록을 위한 소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가 없이 정보를 제공하는 것들이 많았다. 이렇게 콘텐츠들을 쌓아 결국 나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게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라는 건가?
정말로 인터넷에 올리는 콘텐츠들이 돈이 될까? 인터넷에서 글이나 영상을 보고 그걸 구매하는 사람이 있다고?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지만 궁금했다.
사람들이 올리는 콘텐츠들을 분석해보니 직접적으로 나의 제품과 서비스를 홍보하는 케이스도 있었고, 일단 인지도를 높인 다음에 팔 것을 내세우는 케이스도 있었다. 아니면 그냥 콘텐츠 자체를 소비하는 것으로 광고 소득을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 당시 내가 이용하고 있던 블로그를 한번 키워보자고 결심했다. 기존의 '책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일기장'에서 '책 정보뿐 아니라 유용한 정보를 주는 사이트'가 되기로 했다. 당장에 내다 팔 지식이 없어서 그나마 잘 알고 있으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을만한 부동산 지식을 팔기로 했다.
내가 아는 정보,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었지만 막상 이걸 글로 풀어내다 파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1시간이면 글을 다 쓸 줄 알았는데 3~4시간씩 걸리기가 다반사였다. 쓰면 쓸수록 욕심이 났다. 좀 더 보기 편하고, 예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야 그다음 글도 클릭하겠지? 내일은 A주제로 써야지. 앗 B주제도 좋은데? 그럼 내일은 두 개를 써볼까? 그림도 편집해보고 싶다. 영상도 제작해보고 싶다.
이렇게 나는 블로그에 빠져들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글을 쓰다 보니 한두 달 만에 일방문자 3천 명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3천 명이 들어와서 내 제품을 산 것은 아니다. 왜냐면 난 블로그에서 뭘 팔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돈 벌려고 시작한게 아니었던게 실수였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팔 수 있는 고객이 생긴 셈이니 아이템을 정해서 팔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블로그에 손님이 모이던 시절에 내다 팔 물건을 내놓지 못했던 게 아쉽다. 처음이라 사람들을 모으는데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회사일이 너무 바빠져 블로그에 글을 쓰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결국 다시 평범한 블로그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 성공경험은 온라인 콘텐츠를 통해 사업화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소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이후로도 짬이 날 때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네이버 블로그가 아닌 다른 블로그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광고수익을 모으는데 집중해보기도 하고, 조금 다른 채널에 도전해보고 싶어 인스타도 개설했고 글쓰기에 매력을 느끼게 되어 브런치도 시작했다. 이 채널들에서 온라인 모임을 모집해보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면으로 시도를 해보았고 결론적으로 대박을 내지는 못했지만 가능성은 입증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어떤 콘텐츠를 어떻게 발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욕심이 났다. 정보성 글 위주의 블로그도 운영하고 싶고, 퍼스널 브랜딩을 위한 콘텐츠 쌓기도 해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구분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있다. 이 콘텐츠들을 바탕으로 사업화할 아이템에 대해서 구상을 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플랫폼 사업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아주 머릿속에서 난리가 났다.
딱히 퇴사할 생각은 없었는데 퇴사하면 뭐 해 먹고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어졌다. 원래 하던 분야의 일을 조금 디벨롭시켜서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젠 내가 전혀 모르던 세계의 일, 온라인 콘텐츠를 통해 수익을 내는 일, 그 너머 사업을 만들어내는 일 모두 나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제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