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부터 수많은 화제를 남겼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연달아 보던 중, 12화에서 극 중 진진희( 오나라 扮 )의 아들 우수한( 이유진 扮 )이 가출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에피소드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유명 학원의 레벨 테스트에 통과 못한 수한이 엄마 진희에게 혼나다가 엄마가 무척이나 아끼는 접시들을 깨뜨린다. 결국 수한은 뒷일이 두려워 “항상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쳐 죄송합니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가출을 선택한다. 수한이 남긴 편지를 보고 놀란 진희는 매몰차게 아이를 몰아세운 스스로를 반성하며 추운 날 아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고. 결국 아이를 찾은 진희는 수한과 화해의 눈물을 흘리며 가출 사건은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그리고 나는 극 중 진희의 모습에 같은 엄마로서 공감을 느끼며 눈물을 살짝 훔치다 문득 아들 녀석이 처음으로 가출했던 날이 떠올랐다.
2017년 6월 17일 토요일, 요일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무서워서 아무도 안 건드린다는 중2, 아들은 일명 사춘기의 정점이라 불리는 중2병의 시기였다. 그날은 아이 아빠는 출장은 간 터라 우리는 저녁 후 가벼운 산책길에 나섰다. 분위기도 무척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은 며칠 전부터 큰 아이에게 던지고픈 질문이 가득 차 있었다.
큰 아이는 학교 친구들 중 유일하게 폴더폰을 쓰다가 전교생 중 가장 늦게 스마트폰을 산 케이스였다. 스마트폰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수많은 부작용과 갈등을 주변 엄마들로부터 전해 들었던 만큼, 전화기의 기본기능인 ‘연락수단’으로서의 기능만 되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가능하다면 최대한 늦게, 성인이 되면 사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지인으로부터 ‘청소년 안심 기능’을 통해 아이의 핸드폰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듣고 난 후, 어느 정도 안심하며 스마트 폰을 사주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개통해주는 조건은 그 기능을 설치하고 또 사용시간제한 등을 걸어두고 있던 중이었다. 스마트폰 사용시간을 제한하는 기능은 물론이고 일부 어플을 사용 못하도록 잠그는 기능, 특정 키워드(왕따, 야동, 욕설 등)를 검색하면 부모에게 알림이 오는 기능 등 부모 마음에 쏙 드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아들, 엄마가 궁금한 게 있는데... 휴대폰 청소년 안심기능 어떻게 무력화시킨 거야?
아들이 즉시 대답을 하지 않은 만큼 엄마인 나는 궁금함이 더해져 갔다. 며칠 전부터 사용시간이 현저히 줄어들더니 급기야 "0시간"이 뜨는 상황이 온 것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반드시 물어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아들이 모르쇠로 나오며 거짓말을 한다면 엄하게 혼을 내야겠다는 생각만큼은 굳게 하고 있었다.
아들은 엄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역시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스스로를 변호하자는 쪽으로 결론 내린 듯 이내 아들의 입이 열렸다.
“엄마가 설정한 시간은 너무 말도 안 되게 적어. 사용 시간 바꾸는 거 검색해서 알아내서 잠깐만 사용하고 원상 복귀시키려고 했는데… 그게 안 돼서 나도 당황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말고 원상 복귀시키고 시간을 다시 정하며 잘 마무리하려던 그때, 딸아이가 불쑥 끼어들더니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마음이었던 아들은 여기에 폭발했다.
“너는 왜 오빠가 엄마랑 얘기하는데 끼어들어!!!!!!!!”
이내 동생을 향해 소리를 지르더니, 붙잡을 틈도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하지만 기다려도 밤 11시가 다 될 때까지 아들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12시가 다 되었기에 전화를 걸어보니 계속 통화 중이었다. 스토커라도 된 듯 10여 차례나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들은 여전히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순간 괘씸하다는 생각이 확 밀려왔다. 그때였다. 내 머릿속에 못된 생각이 스쳐 지나간 건.
‘네가 휴대폰이 안 되면 들어오겠지….’
나는 당장 휴대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휴대전화 분실신고’를 했다. 그렇게 몇 분 사이에 아들의 스마트폰은 수신만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전화기도 안 되는데 어디서 뭘 하겠어? 어디 집에 와봐라. 내가 문을 열어 주나.’ 하는 생각까지 하며 나는 현관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싶은 마음에 얼른 잠금장치를 다시 열고는 그렇게 문을 잠갔다가 열기를 반복하다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화들짝 놀라 시계를 보니 아침 7시가 아닌가! 후다닥 아들의 방으로 달려가 방 안을 살펴봤지만 아들의 모습은 없었다. 그렇다. 이 녀석이 정말로 가출을 한 거다. 주머니에 10원 한 장 없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친한 언니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때는 어느새 아침 9시가 다되어가던 시간이었다.
“자기 아들, 왜 우리 집에서 잤어? 나 친정 다녀와서 보니 ㅇㅇ이 여기서 잤나 본데?”
세상에... 최근에 잘 어울리지도 않던 친구 집에서 잤을 줄이야...!
-뭐든 처음이 중요하다 했다. 선배 엄마에게 SOS!
일단 아들의 소재가 파악되었단 생각이 들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뭐든 처음이 중요한 법! 혹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습관처럼 집을 나가거나 할까 봐 걱정이 되니 처음부터 상황 정리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습관처럼 집을 나가는 일이 생기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언을 구한 여러 선배 엄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새겨들으며 우리 집의 상황에 맞도록 아이에게 할 말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를 기다리는데, 아무래도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고 이야기를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첫 가출을 한 아이도 아이지만 첫 가출을 당한 나도 나였기에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괜히 아이 방의 침구들 모두 걷어서 근처 코인 세탁소로 향했다. 그렇게 돌아가는 대형 세탁기 속의 이불을 바라보며 머릿속 생각을 정리했다.
일요일의 늦은 오후, 빨래를 마치고 돌아오니 현관에 아들 녀석 슬리퍼가 놓여있다. 방문을 열어보니 슬리퍼를 신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듯, 새까만 발바닥의 흔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침대보와 이불을 모두 걷어놓은 매트리스 위에서 마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런 아들의 모습이 거지꼴이 따로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속상한 마음이 컸지만 막상 웅크린 채 잠들어있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마 이 녀석도 나만큼이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 많이 망설였겠지? 그 뒷모습을 보자니 화도 나고 불쌍하기도 했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아이를 깨웠다. 눈을 뜨고 침대에 앉은 큰아이는 ‘등짝 스매싱’은 기본, 분명 크게 혼날 거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차분한 엄마 반응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처음으로 나눈 '대화다운 대화'
나는 일단 아이의 손을 잡고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별 탈 없이 들어와 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동네 이모가 네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네 위치를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걱정시킨 건 아주 잘못한 일이라고, 온 가족이 너의 행방을 몰라 걱정했다고 차분하게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아들은 차분한 내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고, 그런 아들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후 아들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엄마 난… 늘 최선을 다했어. 그러데 엄마는 항상 더, 더, 내가 해내기를 바라서 정말 힘들었어.”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평소 참을성 많은 아이의 진심 어린 이야기에 나는 그동안 내가 넘겨버렸던 아이의 모습들이 스쳐갔다. 나는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아들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네 말이 맞다… 너는 최선을 다했지…. 엄마가 몰라줘서 정말 미안해. 부족한 건 네가 아니라 엄마였네. 잘 키우고 싶은 마음만 앞서서 널 너무 힘들게 많이 했던 거 같다. 그걸 잘 몰라서 미안해.”
뒤이어 아들은 휴대전화 안심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고 고백했다. 시간제한이 있으니 딱히 필요치 않아도 그 시간이 아까워서 채우고 싶은 마음에 더 하게 되고, 갈증이 나는 것 같아 매달리게 되더라는 것이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렇다면 그 시간 자체를 네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게 맡기겠다고 답했다. 새로운 기준 역시 일방적인 엄마의 기준이 아닌 서로 합의해서 정해 보자고도 제안했다.
"이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오랜만에 아이와 깊이 있는 대화가 큰소리 없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아이도 이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것 같다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간 나와 아들의 대화는 대화라기보다 일방적인 전달이었다. 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밀려온다. 한참을 서로 그렇게 얘기하며 울고 웃었다. 그렇게 아이의 마음이 풀려가는 것을 느끼며 대화가 마무리되어 가던 중 아이가 갑자기 스윽~ 전화기를 내밀었다.
“엄마, 할 말이 있어. 휴대폰 정지 좀 풀어주세요.”
아이 왈, 사실은 그사이 분실 신고된 전화기를 풀어보러 친구랑 대리점을 갔었는데 부모님(보호자) 없이는 안 된다는 답을 듣고 돌아왔단다. 나는 나름 호기롭게 대리점에 들어갔다 좌절하고 나왔을 아이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당장 전화해서 분실 신고를 해제하는 절차를 밟고 아이의 핸드폰 정지를 풀어주었다.
-아이의 첫 가출이 내게 남긴 것
아이의 가출, 어느 집에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건 그 갈등이 생긴 이후 부모의 대처다. 부모의 대처에 따라 이후의 상황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다행히 나의 경우에는 주변인들의 조언으로 아이의 첫 가출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오히려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협의되지 않은 일방적인 규칙, 일방적인 통제, 이것은 잠깐 동안 아이가 '안 하는 척'을 하게 는 만들 수 있지만 아이를 통제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되지 못한다. 서로 지켜야 할 규칙을 세울 때는 아이의 자율적인 의사를 바탕으로 합의의 과정을 거치길 바란다. 이렇게 세워진 규칙이야 말로 가장 합리적인 그 가정만의 규칙이 될 수 있다.
하지 말라고 할수록 더 하고 싶은 건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부모 자식의 다툼의 원인이 되는 휴대폰과 컴퓨터는 가정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더욱 부모와 아이가 서로 공감하는 대전제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아이가 규칙을 지켜내기가 수월하다.
너와 함께 세우는 규칙들은 결코 너를 통제하지 위한 통제가 아니란다. 너의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의 규칙이란다.
여기서 말하는 대전제란 규칙을 세우는 이유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설명하고, 통제를 위한 통제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온전히 부모로서 아이의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아이의 사춘기, 그리고 그 시기에 일어나는 잦은 갈등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먼저 아이들을 키워본 지인들과 교류하며 경험을 나누자. 먼저 겪어보고 여유를 찾은 이들의 경험만큼 값진 조언은 없다. 내 아이를 위해 언제나 열린 귀와 마음으로 조언을 구하자. 물론 그전에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아이와의 소통이다. 부모라는 책임감에 눈이 멀어 아이와의 소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통이 없이는 발전도, 평화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 담긴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작게라도 도움이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