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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Mar 12. 2024

결정에 대한 단상

스물아홉 : 계절과 변화와 내 세상

싹 틔우고 자라난 봉오리가 피운 꽃이 지고 난 뒤 무성해진 녹음이 품은 열매가 무르익어 저문 공허한 자리를 채운 하얀 눈발이 봄볕에 스미듯 녹으면서, 또다시 싹을 틔운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희노애락은 싹트고 피우고 품고 무르익고 저물고 채우고 스미기를 번복 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삶은 계절을 닮았다.


나의 계절은 지금 어디쯤일까. 사계절의 변화는 눈으로 귀로 코로 피부로 맛으로 온 감각을 통해 알리지만 삶의 계절은 도통 보이지도 들리지도 맡을 수도 만질 수도 먹을 수도 없으니, 스스로가 정할 수밖에.




같은 현상을 두고도 누군가에겐 별뜻 없는 사소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다. 누군가에겐 위기감이 바짝 고조되는 일촉즉발에도 다른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은 무료한 여유다. 이렇듯 끝을 향해 다다르는 속도와 온도는 저마다 다 다르다.


결코 내 세상은 ‘그것만’ 일 순 없다. 세상은 혼자 살지 않는다. 또한 수도 없이 쉬지 않고 변화한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완벽이란 허상을 허물고 내 세상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주어진 생을 나름대로 만끽할 뿐이다. 그게 참 별거 아닌 별거다.




아홉 살 연의 수학 숙제를 아빠가 채점하는 중이었다. 분류하기 문제에서 연의 분류 기준은 때때로 정답지를 벗어나 이마를 탁 치게 만든다.


J | 이럴 거면 정답지가 왜 있는 거냐, 도대체. 정답지에서 자꾸 벗어나니까 참 난감하네.


나 | 뭐 어때, 연이가 쓴 것도 정답인걸.


J | 아는데, 채점하는 내가 머릴 써야 되니까 그렇지.


정답이란 어쩌면 절대 척도가 아닌 편익을 위한 일차적 선별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결정이 오래 걸릴수록 다수의 결정을 분별없이 좇을 확률이 높다. 어떤 선택이든 후회하지 않을 가능성이 희박할지언정 다수의 결정을 따름으로서 실패하더라도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주체성과 맞바꾼 일종의 자기 위안이랄까.


다만 간과하지 말자, 애초에 삶이란 맞고 틀린 것은 없기에 타인의 정답은 매 순간 내 삶의 기준이 될 순 없음을. 사소하든 중요하든 선택과 결정을 내리는 나의 시선은 외부가 아닌 내면을 향해야 함을.


어른이란 어쩌면 ‘아는 만큼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갈 줄 아는 용감한 겁쟁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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