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2사이8

망각의 시절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28살 어느 여름 / 2년 만에 마시는 알코올은 핵꿀맛.

by 이선하

Photo by. Tyler Delgado / Unsplash


넷째를 임신한 열 달, 출산 후 모유 단유까지 또 1년이 다 되어가므로 이제 맘 놓고 알코올을 죽 들이킨다. 가끔씩 적당한 음주 정도야 기분전환 삼아 괜찮잖아? 아이들을 재우고 실로 오래간만에 부부간의 정 나누는 대신 알코올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전우애를 다진다.


난생처음 마셔 본 스파클링 와인의 첫맛은 에이 별로다, 했는데 한 모금 두 모금 알딸딸해지면서 차츰 달아진다. 두 병째 접어드니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뛰어다닌다. 막내의 잠투정 섞인 울음소리로 첫째까지 일어났으니 망정이지 여기서 더 달렸으면 아마 다음날 숙취로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신랑의 질문마다 대답이라고 내뱉은 헛소리를 뇌까리며 혼자 울고 불고 난리였다. 그 와중에 막내를 다시 재워 눕히고 큰딸 체온을 체크하고 양치도 하고 할 일은 다한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달라진 점을 하나 꼽자면, 당장 해야 될 일은 잊기 전에 미루지 않고 바로 행해야 한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동안 잠만보 신랑은 여느 때처럼 진작 잠리에 들었다. 식구들 모두가 잠들고 오롯이 혼자 깨어있는 적막한 거실, 취기로 가득한 새벽 두 시 감성 파묻혔다.




좀 전까지 신랑과 둘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왜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냐는 질문에, 어차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의식할 수밖에 없지 않냐고 대답했다. 그럼 사회적 롤 모델이 누구냐는 물음에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추구하는 성향이나 목표는 비교적 뚜렷한 편인데도 말이다.


어쨌든 그 뒤로도 이어지는 질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었다. 지금껏 나는 종종 스스로를 놓게 된다며 섣부른 표현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이 말의 맹점을 비로소 깨닫는다. 정작 나 자신이 누구인지 파악조차 못한 것이다.


미래를 종잡을 수 없어 이미 지난 삶을 되짚어보건만, 그동안에 경험한 일들로 느꼈던 크고 작은 정서나 감상이 좀체 뚜렷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머릿속에 꾸역꾸역 억지로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글로써 기록해두면 그마저도 이질감이 들곤 한다. 지금의 알딸딸함은 곧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듯이 말이다.


나도 참 궁금하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현재는 어떤 사람인가. 나를 이루는 범위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일까. 자아를 정의하는 기준은 뭘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과 내가 생각하는 자아상의 간극은 얼마나 벌어져있고 각각 얼마만큼 수용해야 할까. 환갑을 두 해 넘긴 우리 엄마도 모르시는 것 같던데. 인제 근 30년을 살아온 나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지금 망각의 시절을 겪고 있다. 내가 누구였는지, 누구인지. 앞으로도 지금의 이 시절을 떠올릴수록 선명함을 잃을 것이다. 시간은 뒷걸음질을 마다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을 향해 흘러갈 테니까. 그렇잖아도 잘생긴 배우 공유와 이동욱이 더더욱 멋지게 출연했던 모 드라마에서처럼, 망각이 신의 선물일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덧없는 망각 속에서도 본질은 변치 않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와인의 알딸딸한 감각은 잊어버려도 사실은 남듯이. 삶이라는 여정도 결국 나라는 본질을 찾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잡스런 생각이 드는 알딸딸한 두 시 감성은 어딘가에 기록하는 것으로 갈무리한다. 언젠가 어렴풋하게나마 내 정체성을 이루는데 보태질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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